시민의 권리 건강형평성
형평성(equity)의 이념은 필연적으로 공평성(equality)과 관련된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자원의 배분을 추구하는 공평성과는 달리, 형평성은 개개인의 상황 및 격차, 그리고 필요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보다 공동체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이다.

건강형평성(health equity)은 사회적, 경제적, 인구학적,또는 지역적으로 구분된 인구 집단 사이에 구조적이고 교정 가능한 건강수준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반대 개념인 건강불평등에 대해 WHO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Commission on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는 건강불평등이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빈약한 사회정책과 프로그램, 불공정한 경제제도, 나쁜 정치가 결합된 결과물이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기인한다고 했다.

WHO 헌장에서는 “달성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하는 것은 인종, 종교, 정치적 입장,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의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이다”라고 돼있다. 이는 건강권은 사회적 권리임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건강형평성은 그 권리를 보장하고 불평등의 갭을 최소화하기 위한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WHO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과 건강 격차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건강관련 정책의 개발과 건강불평등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공공건강서비스의 개입의 개념틀을 제공했다. 즉, 건강형평성 증진을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며, 국가, 지방, 지역 등 수준별로 실효성 있는 건강불평등 해소 정책을 시행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한 WHO 회원국의 건강불평등 감소를 목표로 하는 Health 2020은 “2020년까지 건강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25% 감소”하겠다는 총괄목표를 제시하고, 거버넌스 체계를 참여형으로 개선하는 전략목표를 가지고 사회적, 정책적 제안을 했다.

우리나라도 2012년 시민의 건강수준 향상과 건강불평등 해소를 위해 민·관이 협력하고 시민이 참여해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 친화적 공동체를 조성하는 전략을 제시한 ‘건강 서울 36.5’ 등 국가 차원의 Health 2020뿐 아니라 광역 단위의 정책을 수립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지역보건계획에 의한 성인질환관리에 나서는 등 경제사회적 조건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도록 고안된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복지체계는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 소득, 지역에 따른 건강 격차가 존재하고 있고, 특히 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건강지표는 상대적으로 매우 열악하다. 건강형평성학회의 2015년 연구를 보면 소득, 교육 정도가 낮고 농촌 지역일수록 크게는 5년 이상의 기대수명이 낮은 차이가 나타났고, 자살사망률도 높았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할수록 아동청소년의 학대 경험률도 높았고, 청소년 우울, 자살 시도, 자해의 정도가 심했다. 정신장애인의 자살률은 일반인보다 26배 높았고 기대수명도 현저히 낮았다. 건강불평등 개선을 위한, 즉 건강형평성 실현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공공정책 수립과 정교한 실천전략의 수립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병든 사람’이 아니라 ‘질병’과 싸우는 사회
WHO의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위원회 보고서에는 한세대 안에 건강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제안을 담고 있다.우선 일상적 삶의 조건을 개선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출발부터 공정한 사회, 차별 없는 고용과 양질의 일자리, 생애에 걸친 사회적 보호, 보편적 보건의료, 건강한 주거를 위한 정책이 요구된다고 했다. 둘째는 권력, 돈, 불평등 분포를 개선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모든 정책과 체계, 프로그램에 건강형평성을 고려하고, 공정한 재정정책, 양성평등, 사회통합과 참여를 확대하는 정치적 역량 강화, 좋은 국제적 거버넌스를 위한 정책이 요구된다고 했다. 세 번째로는 문제를 측정하고 개입활동의 효과를 평가하는 국가건강형평성 모니터링 체계의 구축과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대한 교육훈련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근 전 세계를 두려움에 빠뜨리고 있는 우한에서 촉발된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문제를 보면 왜 질병에 대처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글로벌한 협력적 거버넌스가 필요한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우한 지역의 자국민을 안전하게 전세기로 이송해 2주간 격리 관찰하며 보호할 수 있는 국력을 가진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로 분리됐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나라이고 그런 정책적 결단을 할 수 있는 나라이며, 분리수용을 받아들이는 지역의 주민 갈등을 정보의 공개와 논의를 거쳐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민·관 협치가 가능한 시민사회인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사회구조적 불평등의 문제가 상호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 봉준호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전 세계가 호응하는 것도, 2019년 노벨경제학상이 글로벌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개발경제학자들에게 주어진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더 이상 국가 내 국가 간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으며, 건강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인류가 건강과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다.

WHO의 정책제안을 참고해볼 때 건강형평성 정책은 포괄적인 사회정책 차원에서 교육, 보건, 복지, 고용, 주거 등 모든 정책의 목표로 수렴돼야 한다. 기존의 파편적이고 분산적인, 비체계적인 정책구조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하고 연계성이 뛰어나며, 소외와 배제, 차별의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공정성을 높이며,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응이 가능한 구조를 통해 전달돼야 한다. 지속가능한 건강형평성 정책 플랫폼 구축을 통해 이해당사자들의 자율적 문제해결능력 배양과 창의적인 정책대안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 단위의 주민참여 토론회, 건강요구조사 등을 활용해 지역의 건강의제를 발굴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을 거쳐 우선 건강의제를 발굴해 해결할 수 있도록 지역 단위의 그리고 전 지구적 공동체 기반 실천계획이 필요하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가난과 질병이지,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아니다”라는 어느 미국 드라마의 대사는 공동체 기반의 건강형평성 지향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문제에 직면하여 깊이 학습하고 있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책입안자, 서비스전달자,참여시민, 대상자 모두 함께 되새겨보면 좋겠다.

김정진 나사렛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김정진 나사렛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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