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공공철학] 코로나 시대에 되살아난 ‘사물物 : 것’의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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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공공철학] 코로나 시대에 되살아난 ‘사물物 : 것’의 공공성
  • 이원진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21.03.2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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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과 그의 사물’의 귀환
괴력을 지닌 한국의 전통 신들이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이인異人’ 즉 이상한 사람들이다. 2013년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에서 다른 행성의 외계인 도민준에서 시작한 ‘이인異人’은 그리고 2016년 드라마 <도깨비>와 <시그널>에 이어, 2017~2018년 영화 <신과 함께>, 2020년 웹툰을 개작한 <쌍갑포차>, 2021년 전 세계를 휩쓴 <경이로운 소문>과 <스위트홈>에까지 등장했다. ‘이인’은 통념에 부합하지 않고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으며 인간과 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해방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생사를 뛰어넘는 존재들로 외계인으로, 도깨비로, 형사 또는 주모酒母 귀신으로, 카운터로, 저승차사로, 괴물로 둔갑한다. 이들은 각각 인간이었던 시절 가졌던 강렬한 ‘욕망’ 때문에 이인이 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드라마 속 이인들이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어디에 쓰는가가 특이하다. 웹툰 원작과 드라마 서사 속 이인은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를 바로잡고 공정성을 구현하는 데 자신을 바친다. 그 부정의는 때로는 과거 939년 전 고려시대(도깨비)부터 400년 전 조선시대(별그대), 1980년대의 현대사(시그널)를 넘나들며 한국 사회의 원한과 미제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한다.

그런 현상은 ‘별그대’의 도민준이 조선시대 천문을 보는 관상감부터 하버드 대학까지 섭렵하며 근대 지식인의 표상을 톱스타였던 천송이가 겪는 대중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미미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정의 구현을 위한 힘을 발휘하는 주체는
<신과 함께>에서는 남성 차사, 그리고 <쌍갑포차>와 <경이로운 소문>, <스위트홈>에서는 드디어 주인공 여성 또는 장애(또는 왕따) 청소년 등의 소수자 그룹으로 옮겨간다. <쌍갑포차>의 이름 자체가 쌍방이 다 갑甲, 즉 갑을관계로부터 종식된 평등적 사회를 만들려는 염원을 드러낸다.

현재 디지털 매체에서 구현되는 한국의 이인 서사에서 이인들은 신과 인간을 잇는 매개체적 존재로 자신을 설정한다. 카운터들은 <경이로운 소문>에서는 ‘융’이라고 부르는 곳과 현실을 오가고, <쌍갑포차>에서는 월주와 귀반장이 꿈의 세계인 ‘그승’이라고 부르는 이승과 저승의 사이 공간과 현실(이승)을 오가며 영혼을 주관하는 활동을 한다. 그들은 악귀를 쫓고 영혼을 ‘원寃’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주로 하는 계약을 하늘과 맺은 상태다.

이것은 명백하게 ‘한국적 우주관’의 부활이다. 한국적 우주관이란 오랫동안 한과 원의 풍습이 있을 때 그것은 전 우주적 평형을 깨고 질서를 파괴해 큰 이변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세계관을 말한다. 한국에는 고래로 ‘원’이라는 감정이 가져올 파급력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설원雪冤이나 해원解冤, 해한解恨의 풍속이 매우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이 사회적,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 혹은 타인의 방해나 억압에 의해서 좌절될 때 그 욕망의 크기만한 고통이 가슴속에 쌓이게 되는데 이를 원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과 한이 발전하면 척隻과 살기殺氣로 드러난다. 해원의 필요성은 이처럼 원과 한이 자라나서 타인의 생명을 억압하고 천지만물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데 있다.

이인(괴물)을 등장시켜 큰 반향을 일으킨 스위트홈

이렇게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새로운 이인들은 권력층을 징벌하고 정의를 바로잡는다. 하늘이 그들에게 힘을 점지한 이유는 그들이 가진 원통함을 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늘의 힘을 빌리거나 일반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는 통로는 의외로 다른 사물과의 연대를 통해서다.

그들은 하늘의 힘을 빌어서 땅을 부르고, 융의 땅에서 나오는 힘을 빌린다. (경이로운 소문) 국숫집이나 포차라는 유동성 좋은 서민의 먹거리 메타포와 쌍갑술(마시면 꿈나라로 가는 술)을 빌려 자신의 정의를 실현한다. 검(도깨비)이나 무전기(시그널), 비녀(별그대, 쌍갑포차)라는 주인과 함께 동고동락한 사물들은 그들의 기억과 원한이 아로새겨진 하나의 행위자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대가 만나는 문이 된다.

기인들의 모든 사물은 단순히 장소성이나 환경이 아니라 주인공과 함께 일을 벌이는 적극적인 행위력을 가진 주체다. 특히 도깨비 김신의 검과 별그대 천송이의 비녀는 그 모든 세월을 함께한 물질적 기억이다. 그 사물들 역시 인간만큼이나 설원雪冤이나 해원解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평형을 바로잡는 전통신 또는 하늘의 관점이 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 한국의 공공성은 어디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까.

‘것까지’의 공공성
한국학자 최봉영 교수는 한국인의 도덕성을 오랫동안 탐색해왔다. 그 결과 한국인은 저들만 좋은 ‘끼리끼리’의 도덕성이 아니라, ‘고루고루’를 넘어 ‘두루두루’의 도덕을 선호해왔고 그것이 한국말에 배어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공공성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한국인이 고루하고 두루하는 일은 조화調和, 화평和平, 균형均衡, 형평衡平, 주지周知, 보편普遍에 이르는 길로서 어울림을 알맞게 해 아름다움을 이루는 바탕이다. 반대로 한국인은 고루하고 두루하지 못한 상태인 불화不和를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겨 매우 싫어한다.
- 최봉영, 「한국인에게 정치는 무엇을 뜻하는가」, 『동양사회사상과 문화』, 2009-

오늘날 한국 사람은 이렇게 고루하고 두루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일을 위화違和, 즉 ‘고루에서 벗어남’이라고 하며 무엇보다 싫어한다. 최봉영 교수는 이 이유가 한국인에게 위화違和는 공공公共을 무시하는 일이고, 어울려 있는 ‘우리’를 돌보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은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쪽과 저쪽을 다 살려서 하나를 이룸으로써 이쪽과 저쪽이 어울려 있는 본디의 모습을 잘 살려낼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 사람이 단군 홍익인간의 정신부터 정치의 목적을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위(그러한 것이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에 자리해 다 살리는 일을 하는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선시대 <훈몽자회>, <광주천자문>, <석봉천자문>, <신증유합> 등을 보면 “공公”이 “그위 공公”으로 돼 있다. “그위”는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모두가 함께하도록 만든다는 뜻으로 다스림을 말하는 기준이 된다.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다스림’은 ‘다 살리다’라는 뜻에서 가져왔다.

다스리는 잣대는 모두를 뜻하는 ‘다’에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다 사리는 게 아니라 어느 하나만을 사릴 때는 “몸을 사리다”, “마음을 사리다”, “뒤를 사리다”라고 말하며 싫어했다. 위화감을 극도로 싫어하는 심정과 비슷하다. 결국, 한국 사람에게 내가 남과 어울려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공공성을 이루는 일이다. 최봉영 교수는 이에 근거해 다음과 같은 한국 사람이 지닌 공공성 의식의 4가지 단계를 말한다.

첫째, ‘저만’ 좋은 상태에 바탕을 둔 공공성이다. 이러한 공공성은 저마다 따로 하는 개체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개인주의에서 주로 내세우는 것이다.
둘째, ‘저들끼리’ 좋은 상태에 바탕을 둔 공공성이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저마다 따로 할 수 있는 것까지도 끼리끼리 뭉쳐서 하나의 우리로서 함께하려고 한다. 이러한 공공성은 저들끼리 함께하는 닫힌 우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집단주의에서 주로 내세우는 것이다.
셋째, ‘남까지’ 좋은 상태에 바탕을 둔 공공성이다. 이들은 저와 저들과 남까지 아울러서 하나의 우리로서 함께하려고 한다. 이러한 공공성은 모든 사람과 함께하는 열린 우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보편주의에서 주로 내세우는 것이다.
넷째, ‘~것까지’ 좋은 상태에 바탕을 둔 공공성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과 하나의 우리를 이루어서 함께하려고 한다. 이러한 공공성은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열린 우리를 바탕으로 저와 저들과 남과 것에서 비롯하는 갖가지 일들을 고루 그리고 두루 알아내고, 알아주고, 알아 하려고 한다.
- 최봉영, 「한국정신의 심층탐험, 한국인과 공공성」, 『월간조선』 2015년 3월호 -

여기서 마지막 단계의 ‘것까지’ 좋은 공공성은 모든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 고루하고 두루하려는 어진 마음이며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공공성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에게 이런 넓은 의미의 공공성 인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확실히 오늘날의 문화현상은 ‘것까지’의 공공성을 드러낸다. ‘태안기름유출사고(2007)’를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정화한 사건은 사물(것)과 어울림을 중시한 어진 마음의 발로였다. 1991년 구미에서 일어난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담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1), 2000년 주한미군의 한강 독극물 유출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은 1995년 생수 판매 합법화 이후 세계에서 높은 정화율을 자랑하는 수돗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수를 사 먹게 된 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들 영화는 독극물과 ‘훼손된 강’ 등 사물(것)이 갖는 정치적 행위력의 강한 의미를 제시한다. 독극물을 흘리면서 양심까지 버려버린 그위 사람들은 단지 ‘저들끼리’의 공공성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훼손된 ‘것까지’인 강물의 공공성이 폐수를 마신 사람들에게 각종 합병증을 일으키며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 아직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공적 사물(것)의 질서를 어지럽힐 때 그 사물의 원寃이 괴물이 돼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게 봉준호 감독의 예언이었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가 ‘것까지’의 공공성을 해칠 경우 그것이 얼마나 큰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는가를 무서우리만큼 강렬히 보여주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다시 주목받은 영화 <감기>(2013)는 바이러스의 감염자들을 한꺼번에 살처분하는 인간을 묘사하면서 그간 인류가 자행한 동물 살처분에 대한 끔찍한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것까지’의 공공성은 단지 사물에만 머물지 않고 동물,식물 등 인간이 자신과 다른 종이라고 생각했던 뭇 생명까지를 포괄한다. 실제 기술발전으로 인해 사물의 행위성이 급부상하기 전까지는 ‘동물까지’ 즉 동물권에 대한 관점 전환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것’의 서사적 전통
그런 점에서 이인異人이 아니라 이류異類의 귀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류에는 그간 인간과 다르다는 이유로 종적 차별을 감당했던 모든 것, 즉 동물, 식물, 그리고 사물들의 서사다. 한국 사람은 전통적으로 ‘것까지’의 윤리성을 어떻게 키우고 일궈왔던 것일까. 가전체소설假傳體小說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사물이나 동물을 의인화해 그 일대기를 고전 형식에 맞춰 허구적으로 각색한 것이 바로 가전체소설이다. 이 장르는 고려부터 조선에서 성행했고, 조선 후기에는 피지배계급에서 성행했던 한글 가전체소설을 연상케 한다.

"자기들만 좋은 ‘끼리끼리’가 아니라 ‘고루고루’를 넘어 ‘두루두루’의 도덕성이 우리에게 배어있어"

조선시대의 우화는 특히 유명했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천지와 음양의 조화를 터득했다는 문장가 장유(張維, 1587~1638)는 「와명부(蛙鳴賦: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보고 듣고 먹기에 즐거운 사물은 마음껏 이용하고, 보고 듣고 먹기에 괴로운 사물은 없애려 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큰 개구리”인 인간을 비판한다. 오히려 다른 생물에게 끼치는 해악은 조그만 개구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장유가 중요하게 여긴 바로 인간과 사물의 관점을 동시에 취하는 것, 달리 말해 나와 남의 관점을 동시에 취하는 것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또한 「호질虎叱」에서 호랑이 입을 빌려, 위선적인 유자를 풍자하고 자연에 대해 잔인하고 약탈적인 인간과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기했다. 특히 조선 후기 송사소설 중에는 우화와 결합한 우화형 송사소설이 많은데 잘 알려진 「황새결송決訟」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두문吏讀文으로 된 「와사옥안蛙蛇獄案」은 잠수군潛水軍 개구리가 자기 아들 올챙이를 살해한 범인으로 택림동澤林洞에 사는 대망大蟒을 관가에 고소한다. 동물인 개구리와 대망의 재판을 통해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재판의 모순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이들 특히 한글로 쓰인 우화는 인간중심주의의 편견을 비웃고 전복을 노린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수행적이다.

또 「조침문」이나 「규중칠우쟁론기」 등 바늘과 실의 규중 이야기나 담배를 의인화한 이옥李鈺의 「남령전南靈傳」 등은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저들끼리의 2단계 공공성)에서 사물이 갖는 정치적 행위성(것까지의 4단계 공공성)으로 인간이 관점을 이동하기를 촉구한다. 이것은 생태적인 사고가 주목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소환해야 할 서사전통이다.

‘것’의 서사적 귀환
과연 오늘날 우리는 이런 서사 전통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을까. 식물이 되는 소설의 시초인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에 이어 동물소설이 오늘날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 고무적이다. 송다금, 백문임은 “시에서는 김혜순의 「피어라 돼지」(2016), 소설에서는 정유정의 「28」(2018)에 이어 정유정의 「진이, 지니」(2019)가 밀렵의 대상으로 난민화되는 동물의 삶을 판타지 기법으로 다루며, 김숨의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2018)는 인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동물의 생명력에 대한 생태학적 시선과 공포를 드러낸다”고 분석한다(송다금·백문임, 2020, 「2010년대 동물화자 소설에 나타난 인간/비인간종(種)의 착종(錯綜)*- 「묘씨생」의 자본주의 생태 속 새로운 관계성」, 구보학보).

급기야 소설 「무민은 채식주의자」(2018)에서 작가 이장욱은 인육을 먹는 트롤 ‘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는 “인간은 명백한 유해 종이므로 각종 대책을 통해 번식을 막는 것이 좋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휴머니즘 같은 기괴한 논리로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을 변호해온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며 인육을 걸신들린 듯이 먹는다. 소설의 말미에 ‘나’는 냉장고에 보관한 사람의 눈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강렬한 시선을 느낀 이후 인육 먹기를 포기한다. 이들 새로운 동물되기 소설은 새로운 식인 동물, 괴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드라마 <스위트홈>이 묘사한 여러 가지 거미괴물, 근육괴물 등은 동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과 함께 인간을 지배하는 정치력을 암시한다. 이류와 이인은 우리의 인간중심적(‘저들끼리’의) 관점에 전환을 요구한다.

"열린 우리가 고루 그리고 두루 알아내고 알아주고 알아 하려고 하는 ‘것’까지의 공공성에 주목해야"

이런 서사적 귀환의 전조는 오늘날 한국에서 출간되는 인문사회과학책에서도 이어진다. 『숲은 생각한다』(2018, 에두아르도 콘), 『매혹하는 식물의 뇌』(2016, 스테파노 만쿠소, 알렉산드라 비올라), 『식물의 사유』(2020, 뤼스 이리가라이),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2020, 호프 자런), 『생동하는 물질』(2020, 제인 베넷) 등에서 보듯 사회과학자들은 비인간인 식물 역시 생각할 수 있는 뇌와 사고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동물을 넘어 식물에게도 표상 능력이 있다는 주장은 형이상학적 인간중심주의를 강력하게 와해시킬 수 있다.

‘것의 의회’ 만들기
모두를 다 살리는 진정한 ‘그위 공公’의 의미를 살리는 공공성이란 것까지 즉 동물과 식물, 사물의 서사가 법으로 제도화될 때 완성된다. 그간 인간이 억압해온 사물과 동물의 원冤은 이야기로 재해석돼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으로까지 연결돼야 한다. 한국이 지녀왔던 ‘것’의 서사는 곧 사물의 의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의회’란 사물이 자신이 지닌 권리를 서로 주장하며 만들어내는 사물들의 민주주의를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의 개념이다. 사물의 의회란 어떤 ‘것’을 사회에 수용할 것인지, 수용할 때는 어떤 역할을 부여할지 인간과 비인간의 다채로운 대변자가 공동으로 협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포럼이다.

유엔의 기후변화 회의가 대표적인 예지만 안국선의 1908년 우화작품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에 그 모태가 이미 있었다. 제목의 ‘금수禽獸’는 날짐승과 들짐승을 아우르는 동물들이 등장해 토론하며 인간을 엄청나게 비판한다. 마침 한국엔 여성 서사가 여성의 법적 권리를 만들어낸 성공 사례가 있다(김지수, 김대홍 역, 2020, 『정의의 감정들』, 너머북스). 조선시대 신분적으로 하층에 속했던 노비 등 기층 여성들이 자신의 원한을 공식 소지所志, 오늘날의 소장訴狀으로 제출하고, 법적 공간 안에서 원한을 해소했던 소원제도訴冤制度가 공식 발전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원을 푸는 것에 관해 국가가 신분과 젠더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동등한 법 적용의 공공성 관념이 적용됐다. 여성들이 이런 소원제도를 적극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언문 또는 이두문으로 발표된 동물우화형 송사소설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의 미디어 콘텐츠에 등장한 괴력을 지닌 소수자 ‘이인異人’들과 그의 물건(‘것’들)은 반가운 신호다. 생사를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외계인, 도깨비, 카운터, 차사, 귀신, 괴물 등은 강력한 인간중심주의의 저들끼리의 ‘욕망’을 더 넓혀 ‘것까지’의 욕망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이들이 만들어낼 ‘것의 의회’를 기대해본다.

이원진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연구교수
이원진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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