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 / 공공칼럼

유난히 많은 논란으로 시작하고 있는 대선
올해 대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각 후보도 선거를 치를 조직 정비를 마치고 조직을 이끌어 갈 인물들을 선정하는 일도 마무리했다. 기존 정당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는 일은 물론, 새로운 인물을 발굴영입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었다. 제한된 인물을 놓고 여야가 서로 경쟁한다는 모습도 의외였지만, 그렇게 경쟁적으로 영입한 인물이 도덕적·정치적 문제로 사퇴하는 사고가 빈발한 것도 특이했다. 한마디로 국민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는 인물을 찾아내기는커녕 여의도 주변에 얼쩡거렸던 문제적 인물들을 주로 동원하면서 이런저런 논란을 야기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의 의회와 정당이 엘리트 충원에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주국가에서 정치 엘리트는 선거를 통해 발굴, 동원된다. 하지만 선거를 치를 주요 행위자인 정당이 그 사회의 주요 의사결정을 담당한 정치 엘리트를 키워내기보다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급급할 경우, 정당의 정치적 행위들은 사회발전 수준과 더욱 유리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각 당이 인물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감동(?)은 크게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인물들이 시민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 주변의 정치적 자영업자들만 영입하면서 새 인물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시민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시민은 지금 우리 정치사회가 우리 사회의 눈높이에 걸맞은 인물을 발굴할 실력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어젠다가 없다는 점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은 어젠다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각 후보에게 복잡한 도덕적 이슈들이 워낙 많아 그들이 제시한 어젠다들이 묻혀버린 측면도 있다. 여야 정당이 이번 선거에서 특히 네거티브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도 각 후보가 많은 도덕적 결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거 대통령 선거에 비해 어젠다가 빈곤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각 후보가 어떤 슬로건을 제시하고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과거에도 도덕적 이슈에 대한 네거티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대통령에 출마한 후보라면, 설령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자신이 ‘이 시대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어젠다는 제시하고 강변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여야 후보들이 대통령이 될 경우 무엇을 하겠다는 ‘주장’이 분명하지 않다. 물론 청년세대(MZ세대)를 향해 ‘공정’을 강조하고, 자영업자 손실 보상을 위해 얼마나 큰 돈을 쓸 것인지 논쟁하기도 한다.

이런 논란에서 여야의 후보 사이에는 보상액의 차이는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시대적 인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우리 정치사회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고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은 지 오래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정치 엘리트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 사회의 ‘정치적 빈곤’의 결과이다.

민주사회에서 선거란 어젠다를 교체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그 교체된 어젠다를 추진하기 위한 정치 엘리트 충원 과정이기도 하다. 특정 시대의 어젠다는 그것을 실현할 정치 엘리트가 있을 때만 구체성을 갖는다.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어젠다(깃발)를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집권하면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시민이 대통령 선거에 기대하는 바도 이 같은 어젠다 교체, 새로운 정치 엘리트 충원이다. 이 같은 기대 때문에 수많은 의회 지도자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하면서 의원내각제를 주장했지만, 시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의 정당 구조 속에서 내각제는 ‘어젠다의 교체’와 ‘새로운 정치 엘리트 충원’은 커녕, 시대에 동떨어진 정치 세력의 기득권만 강화하게 될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어젠다는 새로운 정치 엘리트를 요구한다
유럽 선진국에 비해 우리 정치는 역동적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정치적 역동성은 우리 사회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되기도 했다. 물론 특정 시대의 정치적 어젠다와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는 서로 평가를 달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치 어젠다와 엘리트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역동성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역동성은 기본적으로 시민의 적극적 참여에 기반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제’라는 정치제도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 이는 대통령제가 시민에 의해 ‘쟁취’한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제가 시민의 정치참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현대사는 ‘대통령’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의 교체과정은 정치적 어젠다 및 정치 엘리트의 교체와 밀접하게 맞물려 왔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건국’은 주요한 정치 어젠다였고, 이를 놓고 민족주의 세력과 관료적 친일 집단이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6·25전쟁을 통해 성장한 군부 세력이 ‘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으로 장기간 집권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 엘리트들을 독점적으로 공급해왔다. 그리고 그 사생아들이 ‘정의사회 구현’(전두환)이나 ‘보통사람의 시대’(노태우)라는 허구적 슬로건으로 집권 연장을 도모했으나, 그들의 폭력성 때문에 시민적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화(1987년) 이후 정치적 어젠다 및 엘리트의 교체는 급격하게 진행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화’라는 이름으로 의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을 구축했고, 이를 기반으로 군부독재의 물리적·경제적 기반을 허물어뜨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화해와 평화’라는 어젠다로 급진적 민주화 운동 세력들을 정치 엘리트로 새롭게 충원해 나갔다. 과거 군사독재와 달리 의회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엘리트 교체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유사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반독재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시민 및 학생운동 엘리트를 보다 과감하게 의회로 편입시켰다.

노무현의 ‘사람사는세상’이라는 슬로건은 시민정치 세력의 새로운 등장과 맞물려 폭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터넷 기반의 정치 소통구조는 기존의 냉전주의, 지역주의를 거부하는 새로운 시민정치 세력의 진출을 가능케 했다. 인터넷 정치 소통구조는 과거의 중앙집권적 소통에서 벗어나 균형, 분권, 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구축해나갔다. 이를 기반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게 됐다.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을 자처한 이명박 정부의 집권은 사실상 ‘시장적 보수’와 ‘이념적 보수’가 연합한 결과이며, 이 같은 정치적 연대는 ‘이념적 보수’를 대표하는 박근혜 정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지속되고 있던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지나치게 과도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종사자 기준 32%)의 위기감을 정치적으로 동원해 보수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시장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들도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공정’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최저임금, 복지 강화 등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확충하는 데 집중했다. ‘에너지 전환’과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추진, 안착시키는 데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 엘리트 대부분은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 함께 경험을 공유했던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공공성, ‘충성’도 ‘용기’도 아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자. 이번 대선에서 각 후보가 내세운 깃발(어젠다)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깃발인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아직 각 후보 진영들이 왜 집권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오히려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진보와 보수 각 진영이 모두 부여잡고 있는 찢어지고 낡아빠진 깃발들이다. 지금 각 후보는 철 지난 과거의 깃발을 들고 21세기 시민을 유혹(?)하고자 하는 ‘희극’을 연출하고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충성’을 시민적 가치로 강요했다. 실제로 군사독재는 그들의 ‘보상체계’ 속에서 정치사회, 경제사회, 그리고 심지어 언론을 비롯한 시민사회마저 서열화했다. 당시에는 ‘충성’이야말로 정치 엘리트 충원의 핵심 가치이자 기준이었다. 아직도 한국의 보수정치 일각에서는 이를 금과옥조처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시장에서의 ‘합리적 이익’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시장적 보수’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지만, ‘충성’을 주요 무기로 삼는 ‘이념적 보수’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충성’에 저항했던 진보의 가치는 다름 아닌 ‘용기’였다. 정의롭지 못한 일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불살랐던 ‘용기’에 대해 시민은 그 진정성에 공감하면서 이들이 새로운 정치 엘리트로 진출하는 데 동의했다. 이들은 시민정치 세력을 기반으로 정치적 역할을 확대했으며, 진보 대통령들의 집권에 참여해 국정운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이 정치적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우리 사회는 과거와 같이 ‘용기’만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정도로 단일한 사회가 아니다. 사회발전이 ‘분화’와 ‘전문화’라는 막스 베버의 설명에 따른다면, 우리 사회는 과거와 전혀 다른 질적 수준의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론이고 문화적 다양성 또한 과거의 기준으로 더 이상 가늠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경제는 물론, 교육, 법률, 종교, 문화, 의료 등 각 분야는 나름대로 전문성을 바탕으로 제도화가 돼 가고 있다. 이제 IT 기술이 가져올 사회변화를 예측하는 일 따위도 진부할 정도가 됐다.

당연히 과거의 아젠다들은 급속히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 보수의 ‘전가보도’였던 ‘경제 성장’과 ‘시장경제’도 제한적 유효성만 가질 뿐이다. IT 기술을 기반의 생산시스템은 노동-자본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물론, 시장의 성격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생산시스템과 시장의 복잡성이 증가함으로써 과거의 ‘시장’과 ‘성장’은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진보의 핵심 아젠다였던 ‘복지’도 보다 세밀한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투명성과 효율성은 물론, 공정성의 차원에서 지금까지 추진해왔던 기존의 복지정책들도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다.

과거의 의제 중에 무력화되고 있는 대표적 의제가 ‘통일’이다. 군사적 서열체계와 함께 ‘충성’을 강요했던 냉전시대의 반공 논리가 정당성을 잃은 지 오래다. 이런 강요에 저항하기 위해 ‘용기’ 있는 학생과 목사, 그리고 소설가들이 직접 북한을 방문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런 ‘용기’에 힘입어 ‘북한 바로 알기’ 대중운동이 전개됐고, 학문적 담론공간에서는 ‘내재적 비판론’이라는 연구방법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과거에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던 ‘통일’은 이제 많은 조건이 충족될 때만 논의할 수 있는 의제가 됐다. 대신 당장 필요하고도 가능한 어젠다로 자리 잡은 것은 ‘평화’였다. 하지만 이것이 냉전주의자들에 의해서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은 명확하다. ‘북한 바로 알기’나 ‘내재적 비판론’도 현재 남북관계를 둘러싼 국제적 역동성을 설명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적 이익과 군사적 동맹을 적절히 절충하면서 국가 운영 전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의 패권경쟁은 이 같은 절충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계기로 대기업들은 경제적 이익과 군사적 동맹을 일치시켜 미국에 투자하는데 발 벗고 나섰다. 우리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유지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담론이 요구되고 있다. 이제는 ‘충성’도 ‘용기’도 더 이상 한반도 평화를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리트 교체’ 요구에 직면한 국가들
로마제국의 정치 엘리트 육성 방식은 독특했다. 로마가 약 1천 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독특한 정치 엘리트 육성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광활한 로마는 변방의 통치자 아들이나 특별한 자질을 가진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황제 직속의 교육기관에서 교육했다. 황제는 교육과정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양자로 입양한 후, 그 양자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을 구축해준다.

물론 친자일 경우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친자든 양자든 통치권이 아들에게 양위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변방의 다양한 문화와 정치적 상상력을 로마로 모아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려는 정치기획이었다. 황제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형성된 이들을 다시 변방의 책임자로 내려보내 통치케 한다. 그럼으로써 새로 등극하는 황제는 든든한 정치적 기반을 갖게 된다.

어느 시대, 어떤 국가든 정치 엘리트 육성은 긴요하다. 사회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는 지금 다음 세대를 위한 엘리트 교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는 푸틴 주도로 2018년부터 ‘러시아의 리더들’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에 3년 동안 6백여만 명이 참여했고 그중에 3백여 명의 인재를 골라 공직에 임명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개각을 통해 젊은 새로운 총리와 인물들로 교체했다(김석환 지음, 『21세기 러시아의 이해』)

지금 러시아의 고민은 다양하다. 개혁개방, 그리고 민영화분권화를 추진해왔던 러시아는 복합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부富를 축적한 신흥 부자들(올리가르흐)은 외국 자본과 유착돼 갔다. 분권화로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한 결과, 부패한 지역 토착 세력들이 연대해 중앙권력에 도전하는 일도 벌어진다.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러시아 주변 국가는 물론 러시아 연방의 변방들이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소비에트 연방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푸틴이 세대교체에 적극적인 이유는, 개혁개방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연방 관료나 실로비키(권력 실세)가 아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중국도 공산당 중심으로 엘리트 재생산을 추구해왔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 소위 ‘민주집중제’를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한 엘리트 교체를 준비해왔고, 통상 주요 정치적 인물의 교체와 함께 엘리트 교체를 진행해왔다. 개혁·개방을 추진해온 중국도 러시아와 유사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부패를 다루는 중국의 방식도 이 같은 국내·외적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응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중국은 시진핑 중심으로 이런 문제에 대응하고 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는 곧 대안적 세력에 대한 고민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엘리트를 교체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 사회의 발전 속도에 맞춰 어젠다와 그것을 담당할 정치 엘리트들을 적절하게 등장시키는 경우이다. 하지만 선거 공간이 항상 이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최근 일본의 정체停滯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정치에 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정치제도에서 선거가 정치적 역동성을 생산하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미국도 이젠 과거 1970, 80년대의 미국이 아니다. 경제적 양극화는 중산층을 붕괴시켜 사회적 통합을 약화시키고 있다. 저소득저학력 백인을 기반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그 대안으로 선택됐지만, 그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기획이 되고 말았다. 대신 미국이 선택한 것은 전통적 민주당이다. 변화하는 국내적, 국제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하고 과거의 민주당으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

왜곡된 정치경쟁 구도: ‘세대교체’라는 허구
우리에게도 새로운 문제 상황이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떠나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인구감소이다. 인구감소는 교육시스템,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개혁을 요구한다. 인구절벽에 직면한 지자체들의 통폐합을 통한 행정구역 개편 및 혁신이 불가피하다. 아울러 노령화로 건강보험을 비롯한 복지체계 및 각종 연금개혁 개혁도 피해갈 수 없다.

이외에도 인구감소와 관련해 논의해야 할 이슈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그에 대한 대안이 전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정치적 담론조차 형성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담론을 이끌어갈 정치 세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 각 진영은 대선의 승리에 혈안이 돼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번 선거는 크게 보면 두 개의 문제적 세력이 경쟁하고 있다. 하나는 과거 권위주의 보상체계 속에 성장해왔던 검찰 권력 일부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검찰은 한때 권위주의 권력의 물리력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이 같은 검찰이 권위주의 퇴행 이후에도 보수정당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어떻게 보면 보수의 마지막 위기를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하방下方’했던 학생운동 세력의 중앙 진입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학생운동 세력들은 국회에 진입한 데 이어 지역의 시민운동과 결합하면서 지방정부에도 진출했다. 지방정부에서 이들은 ‘이해관계 네트워크’를 구축해 정치자본을 비축해 나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생계형 정치인들이 이제 ‘정치의 빈곤’에 직면한 중앙정치를 점령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돈 뿌리기’ 외에 우리 사회의 핵심적 과제와 대안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은 중앙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겨우 눈에 띄는 것은 청년세대에 대한 관심이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 어젠다가 없는 단순 세대교체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프랑스가 30대 대통령과 새로운 정치 세력을 배출시킨 바가 있다. 캐나다도 젊은 총리를 통해 정치적 세대교체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칠레에서 35세 좌파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떠들썩하다. 하지만 문제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어젠다가 있느냐의 여부이다.

오히려 우리 정치도 미국처럼 ‘노인정치’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대안 없는 정치 세력들의 적대적 의존으로 정치혐오는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치적 무관심이 더욱 확산되기 마련이고, 생계형 정치인들은 소수를 결집시켜 기존 정치생명을 연장해나가는 데 더욱 유능해진다. 이때 선거는 여의도 주변의 한정된 기득권 정치 자영업자들의 잔치가 되고, 청년들은 이들을 위한 일회성 치장품으로 전락한다. 새해에는 정말 피하고 싶은 우울한 예측이다.

김창호 법무법인 클라스 고문
김창호 법무법인 클라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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