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있는 풍경

‘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편집자 주>

어느 순간부터 고기에서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기를 워낙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냉장고에 늘 고기를 양껏 사서 쟁여 놓는다. 아들은 언제든지 두툼한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한판 ‘순삭’한다. 고기를 요리해주기는 하지만 정작 나는 거의 먹지 않게 된다.
“맛있어?”
“응, 엄마도 좀 먹어봐!”
“난, 고기 냄새가 나서 못 먹겠어.”
“헐, 난 고기 냄새 때문에 먹는데……”
정말 웃긴 대화다.

고기 냄새 때문에…
고기가 입에 맞지 않으니 생애 어느 때보다 채소를 많이 먹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채소를 요리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보고 시도해 본다. 김치나 샐러드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사실 채소요리들은 까다롭다. 조심이 다뤄줘야 한다.

최근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잘 해먹는다. 올리브 오일과 레몬즙에 바질과 양파 등으로 향미를 더해 토마토나 방울토마토에 끼얹어 놓는 기초반찬 같은 것이다. 푹 담가진 토마토를 건져 그것만 먹기도 하고 잘게 썰어서 토스트 위에 올려 오픈 샌드위치처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래서 시장 보러 가면 꼭 토마토를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질이다. 바질 같은 채소는 한두 잎 필요한 것인데 한 팩을 사야 하니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처음엔 한 팩 사서 김치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며칠 후 꺼내 보니 새까맣고 흐물거려 모두 버리고 말았다. 후에 알게 된 거지만 바질은 실온에 보관해야 하는 채소다. 그러니 더더욱 몇 잎의 채소가 아쉽고 필요할 때가 많다.

게다가! 요즘 채소 값이 어마어마하다.
호박 넣은 자작한 된장찌개가 생각나는 저녁 퇴근길, 늘 들르는 친환경 식품가게에서 호박을 하나 집어 들었다. 호박 하나에 4800원. 당근 하나 2000원, 양파 3~4개 든 것이 2800원. 오 마이 갓! 이 세 가지에 두부까지 더하면 재료만 1만원이 넘어가는 된장찌개가 된다. 눈물을 머금고 돌아 나와 일반마트에서 환경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재료들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 곁에 꽤 넓은 텃밭을 가꾸는 지인이 주말에 한번 다녀가라고 연락이 왔다. 일산 끄트머리다. 남양주에 사는 내가 외곽도로를 달려 한 시간 가까운 그녀의 집에 다니러 가는 건 몹시 번거로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텃밭이 탐나서 기꺼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부터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다고 밥 먹자 했지만 그 먼 거리를 밥 한 끼 하자고 나서게 되지 않아 늘 미적거렸는데 이번엔 달랐다.

멀어서 맛집도 마다했는데 차로 한 시간 달려 텃밭에
그녀의 집에서 시원한 주스를 한잔 마시고 바로 텃밭부터 내려가 보았다. 20~30평 되는 무성한 텃밭을 보니 나는 그만 눈이 뒤집혔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야채가 널려 있다니! 상추, 시금치, 치커리, 청경채, 케일, 로메인, 오이, 방울토마토, 게다가 피자위에 올려져 먹어본 루꼴라도 한 가득이고 그토록 애정해 마지않는 바질도 싱싱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 많은 야채를 언제 다 먹을 수 있겠나 싶었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싱싱한 유기농 야채를 ‘득템’하겠나 싶어 마음껏 따가라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심지어 텃밭 옆에 닭장을 만들어 10여 마리 닭도 키우고 있었는데 그날 낳은 신선한 달걀도 서너 개 바구니에 넣어주었다.

집에 오자마자 냉동실에 있던 한 조각 피자를 꺼내 데우며 그 위에 루꼴라를 듬뿍 얹었다. 시금치도 올리브 오일로 살짝 팬에 볶아 소금과 후추만 쳐서 접시에 담았다. 크기는 작았지만 그날 낳은 달걀도 바로 프라이로!

그날의 야채는 그 후 거의 매 끼니 식재료로 쓰여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바질은 역시 검게 변색되었다. 버리기 아까워 잘 씻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그 상태로 요리에 쓰고 있다. 바질이 필요한 매순간 갓 따낸 매끈한 바질 잎사귀가 아쉽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바질 몇 잎을 따러 일산까지 달려갈 수도 없고 말이다.

지방에 사는 모 대학교수가 방학동안 식사당번이라며 텃밭에서 따온 재료로 만든 점심 식사사진을 SNS에 올려놓았다. 호박 갈치 찜과 감자조림, 쌈 야채로 한상 가득했다. 사진만으로도 그 맛이 짐작되었다. 텃밭이 집 마당에 있어서 식사준비 전에 일단 텃밭에 나가 밭의 현황을 보고 식사의 메뉴를 정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맛을 정말 잘 안다. 며칠 전의 일산 나들이가 아니어도. 너무 부럽다고 했더니 부러워만 말고 직접 해보시라 한다.

다시 텃밭을 꿈꾼다
돌이켜보니 나도 아이가 3~4살이던 때부터 10년 가까이 텃밭을 일구었다. 어느 해엔 100평의 언덕 밭을 얻게 되어 정말 안 심어본 게 없을 만큼 다양하게 야채를 심어 먹었다. 당근 모종을 심지 않고 씨앗으로 뿌렸는데 손가락만한 당근이 엄청나게 많이 올라왔다. 제대로 된 것을 옮겨 심고 솎아낸 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 먹어보았는데 ‘세상에! 당근이 이런 맛이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먹은 당근은 다 당근이 아니었다.
무도 마찬가지다. 봄에서 여름은 손가락 당근을 간식으로 때론 손님접대로 내놨고 가을, 겨울은 무를 과일처럼 먹었다. 김장을 직접 심은 배추와 무로 담갔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어느 해엔 고춧가루도 직접 수확한 것을 말리고 빻아 김장에 썼다.

텃밭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 하나 둘 생각나기 시작하니 ‘왜 지금은 텃밭을 안 하게 된 거지?’ 자문하게 되었다. 아이가 텃밭에 같이 나가서 곁에서 꼬물꼬물 놀아주던 시절이 지나니 텃밭도 농사라고 꽤나 힘겨운 노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는 직장일도 훨씬 치열해져 주말 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다시 텃밭을 꿈꾸게 된다. 혼자서 힘들면 몇 가정이 텃밭을 중심으로 모여 함께 자급자족(까지는 어렵겠지만)하며 건강한 식탁을 누리는 생활을 꿈꾸게 된다.
Why not?

박소원 모네상스 전무이사
박소원 모네상스 전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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