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 공공칼럼

위기의 징후들
최근 달러 환율이 1천300원을 넘어섰다. 이 같은 높은 환율은 2천 원을 넘었던 1997년 IMF 위기(외환보유고가 바닥나 국가부도를 선언하고 IMF 지원을 받았던 상황), 그리고 1천600원을 넘어섰던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달러 환율을 걱정하는 것은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만은 아니다. 안전자산인 달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국내에 투자됐던 달러들이 다시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될 것이 ‘명약관화’다. 벌써 외환보유고에 빨간불이 켜져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심지어 국가부도를 우려하기도 한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도 매우 위험한 징후들이다. 지난 6월 물가상승률이 6%에 이른다. 앞으로 물가가 얼마나 더 오르게 될지 예측하는 것조차 두렵다. 물가가 오르면 수요가 줄어들게 되고, 수요가 줄어들면 산업생산이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또다시 총수요를 축소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월급생활자와 저소득층이 가장 고통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다.

금융도 불안하다. 인플레이션과 함께 소득이 줄어들면 은행도 긴축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이와 함께 융자금들을 회수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한계 선상에 있던 시민은, 특히 부동산 버블 붕괴와 함께 파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를 잘 회수하지 못한다면 은행도 부도 위기를 피해 갈 수 없다.

지난 30년과 다른 국제 환경
미국도 당분간 고금리 정책으로 달러를 회수하려 할 것이다. 저생산을 감내하고서라도 인플레를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따라 이자율을 계속 높여 시장 달러를 회수하려 할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안전자산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환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는 또한 원자재 가격 상승을 부추겨서, 당분간 고환율·고물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위기가 과거와는 다른 조건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여러 차례 경제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이미 언급한 IMF 외환 위기나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외에도 국제적 차원의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크고 작은 위기를 숱하게 거쳐 왔다. 우리 경제가 주로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우리의 경제 위기도 대부분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정도의 경제적 안전판이 부재했던 상황에서 외부의 충격은 우리 국민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게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부분의 위기를 쉽게 넘어설 수 있었다. 그것은 확장돼가고 있었던 세계 경제의 도움이 컸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의 개방, 그리고 제3세계의 세계시장으로 편입되면서 지난 30여 년간 세계 경제는 대체로 호황을 맞았다. 원자재 가격이 안정화됐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장이 창출되고 지속적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확장 국면에서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위기는 큰 어려움 없이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국제 환경은 진영 사이의 패권 경쟁으로 특정 시장을 선택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시장이 축소되는 방향으로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해석은 나눠진다. 과거의 냉전체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블록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신新냉전’이냐 ‘블록화’이냐
미국은 지난 30여 년간 ‘세계화’를 주요 의제로 삼아 글로벌 금융으로 경제적 패권을 형성해왔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달러를 찍어 뿌리기에 급급했다. 펜데믹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지난 3년간도 마찬가지였다. 금리를 낮추거나 달러를 찍어 ‘헬리콥터 돈 살포하기’에 바빴다. 뿌려진 수많은 돈들은 주로 부동산으로 몰렸고, 한국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생산은 오히려 위축됐다. 최근에는 펜데믹이 결정타를 먹였다. 이처럼 생산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을 더 이상 방치하면 또다시 금융위기를 불러올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미국은 경제침체를 감수하고서라도 고금리로 달러를 회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더욱 우려하는 것은 미국 경제 패권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의 도전이다. 이 같은 도전은 단순히 시장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 및 군사적 차원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우려와 함께 미국은 세계 경제를 재편(그것이 ‘신냉전’이든, ‘블록화’이든)하려는 의지를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 오고 있었다. 중국이 바로 일차적 타깃이었다. 중국을 과거처럼 시장 속에 통합시키기보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봉쇄하려는 미국의 여러 조치가 진작부터 시도되고 있다.

펜데믹 막바지에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같은 흐름의 본격화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단순히 푸틴의 야욕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천박한 이해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과거처럼 ‘달러’가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를 통해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겠다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신재생’ 에너지를 중심으로 세계 경제를 주도·통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가장 많은 화석 에너지를 생산·소비하는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중심의 세계 재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무모한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 결과는 낙관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허접한’ 전투력으로 강대국 이미지에 손상을 입은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전략적 차원에서 러시아는 결코 패배했다고 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에너지 가격은 폭등하고 있는 가운데, 인도와 브라질 등 주요 경제 대국들이 미국의 러시아 봉쇄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

특히 나토의 핵심 국가 중 하나인 독일과 프랑스도 러시아에 대한 공개적 비판과 달리, 뒤로는 러시아와 뒷거래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겨울로 다가갈수록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는 유럽이 미국의 대러 봉쇄를 계속 굳건하게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불쌍한 것은 애꿎게 죽어나간 우크라이나 국민뿐이다.

대안의 부재 : ‘헤어질 결심’은 있는가
중국·러시아 등의 시장 확대로 성장해온 우리나라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제 세계 경제가 재편되면서 ‘외교·안보 = 미국, 경제 = 중국’식의 분리 전략은 더 이상 먹혀들기 어렵게 됐다. 패권 대결이 심화되는 가운데 과거와 같은 ‘중국 의존 경제’만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중국 배제 경제’는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시장의 축소를 감내하더라도 과거 냉전 논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일부 맹목적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비단 석유 등 원자재를 둘러싼 국제시장 질서나 국제정치 환경 재편에만 머물지 않는다. 남북관계 외에도 국내적으로 매우 다양한 변수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확장 경제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여러 사회적 갈등이 폭발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빈부 격차가 두드러지면서 이를 둘러싼 여러 제도의 개혁을 두고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공공영역, 국민, 그리고 기업 사이에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근본적 고민을 해야 하게 될 것이다. 특히 공공영역에서 복지 및 연기금을 어떻게 개혁할지를 놓고 집단 간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처럼 예상되는 국제정치 및 경제 질서의 재편, 그리고 국내의 다양한 위기·갈등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마저 ‘대안’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은 기껏해야 실패한 이명박 정부 정책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 정책을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하면 법인세 감세, 부동산 관련 세금 완화, 임금동결이다. 한마디로 서민과 월급쟁이 소득을 줄이고 기업과 부자에게 이익을 몰아주면 기업투자가 늘어날 것이고 결국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이미 실패한 이명박 정권이 추진했던 구시대적 정책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런 정책이 가져올 불행한 결과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예상되는 일이다.

국제적 정치경제 상황과 맞물려 야기될 국내적 문제들을 고려하면 낡은 체제에 안주하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없다. 기존의 체제와 ‘헤어질 결심’을 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체제를 마련할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정치세력에서 이 같은 새로운 상상력을 모색하려는 시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 집권 세력부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글러 버린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문제는 과학과 시스템의 부재
취임한 지 겨우 2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윤석열 정부가 위기를 맞고 있다. 지지율을 회복할 정치적 동력도 마땅히 눈에 띄지 않는다. 앞으로 지지율은 더욱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한국 대통령제에서 ‘초고후저初高後低’ 현상은 언제나 있어 왔다. 초기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던 대통령도 결국 낮은 지지율로 퇴임을 맞게 되는 것이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런 흐름을 고려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같은 ‘초고후저初高後低’ 현상을 두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실패했다는 근거로 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의 실패를 제도의 실패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개입돼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제도와 별개로 행위자 요인을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통령 개인의 자질과 능력이다.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대통령이며, 따라서 대통령의 실패는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대통령 리더십 실패의 결과이다. 나아가 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국민에게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정당들인 만큼, 대통령의 실패는 곧 정당의 실패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학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시스템에 대한 이해 능력’이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는 소통 능력이 대통령의 주요한 덕목으로 부각된 적도 있다. 미디어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1980년대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이 대중을 직접 설득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9·11테러를 경험하면서 대통령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과학적 인식’과 ‘시스템에 대한 이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요컨대, 미국 사회 내에서 공적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대통령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모두 인식하고 판단할 필요는 없지만, 집권 세력의 중심에 그 같은 과학적 인식 집단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대통령 또한 과학적 인식을 주도하고 이끌어갈 정도의 훈련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과학적 인식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조직적 역량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냉전 시대의 군사정보 조직을 혁신하고 방대한 정부조직을 이끌기 위해 조직적 감수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일레인 카마르크,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

‘과거청산’이냐 ‘정치보복’이냐
과거 대통령이 위기에 직면하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통합정치’라 할 수 있다. 반대하는 야당과 중도층을 끌어들여 정치적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 김영삼·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시도한 경우가 대표적이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제안’도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과거청산’이다. 역대 정부 대부분 지지율이 떨어지면 전임 정부 핵심 인사들을 구속해 반전을 꾀해왔다. 특히 나름대로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 집권 세력일수록 과거청산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과거와의 화해’를 내세웠던 김대중 정부와 달리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과거청산에 몰두했으며, 박근혜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도 ‘적폐청산’을 적극 추진한 바 있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지지를 공고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거청산’으로 잠시 지지율을 올릴 수는 있지만, 지지율 하락에 대한 근본적 처방 없이는 일시적 방편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박근혜 탄핵으로 부여받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지금의 윤석열 정부의 ‘과거청산’은 명백히 그 역사적 성격이 다르다. 박근혜 탄핵 이후 그 적폐에 대한 청산은 역사적 정당성을 합법적으로 부여받았던 것이었다면, 지금은 단순히 정치적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성격이 강하다.

윤석열 정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사법정치’이다. 어떻게 하면 사법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 많은 경험을 해왔다.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면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인식,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조직적 문제해결보다 과거 사건을 소환해 사법 조치함으로써 상황을 돌파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그 같은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징후들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단기적 충격으로 바꿔나가기에는 매우 복합적이고 체계적이다. 그런 만큼 한 개인의 스타일 변화나 정치적 선동으로 정치적 국면을 바꿔나갈 수는 없다. 그것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정부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콘텐츠가 없다
흔히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 홍보에 그 책임을 묻는다. ‘대통령은 훌륭하고 정책도 탁월한데, 문제는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은 대부분 내용의 부재, 즉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부재, 나아가 그것을 실현할 조직적 감수성 부재에서 비롯된다. 아무것도 없는 내용을 어떻게 홍보하라는 것인가? 그리고 설령 어떤 내용이 있다 한들 조직적 이해 없이 혼자 책상치고 흥분하면 정부가 알아서 굴러가는 것일까?

소통의 핵심도 ‘과학’과 ‘시스템’이다. 매일 카메라에 노출된다고 국민과 열심히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시민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시스템을 마련해놓고 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인식과 요구를 과학적으로 분석·판단하고, 이에 따라 정확한 메시지를 내놓는 것이야말로 소통의 핵심이다. 물론 그것도 정부에 있는 다양한 시스템을 이해, 활용할 때만 가능하다.

심지어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도 좋다. 시스템만 작동하면 의제를 주도할 수 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오히려 집권 정당에는 기회일 수 있다. 위기일수록 시민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다. 따라서 위기는 오히려 집권 세력에게 의제를 주도할 기회이다. 문제는 의제를 주도할 수 있는 과학적 인식과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느냐의 여부이다.

의제집단을 만들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를 채우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물론 대안의 부재는 현 집권 세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지식사회 전체의 과제이자 문제이기도 하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위기 진단과 대안 찾기를 주요 담론으로 삼는 연구자 집단이 광범위하게 형성될 때만, 우리 사회는 물론 정치집단도 실질적 내용으로 채워진 정치행위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연구기관이 있다. 정당마다 정책 연구소가 있지만, 선거 여론조사 외에 위기 진단과 대안을 연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국책연구기관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정부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미시적 연구에만 매달릴 뿐 아직 우리 사회 진로에 대한 큰 그림을 내놓은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기업연구소는 기업의 이익 이외에 국가공동체에 대한 의제를 다루기를 꺼린다. 그렇다고 이에 대해 대학교수들의 연구가 활발한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 이 같은 담론을 공개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집단은 싱크탱크 그룹이다. 거부巨富들의 기부로 기금을 만들어 운영되고 있는 이들 싱크탱크 그룹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나름대로 미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담론을 주도해 나간다. 단순히 미국 국내 문제뿐 아니라 심지어 세계 군사 및 경제 전략에서도 이들은 대안 담론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긴요한 것도 바로 이 같은 대안담론 그룹들이다. 대안 담론이 있을 때만 정치교체, 세력교체, 세대교체도 가능하다. 대안담론 없는 ‘교체’는 기만에 불과하다. 대안이 있어야 과거도 청산하고, 소통도 하고, 국민적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무엇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과거청산’만을 외친다면, 그것은 반동의 신호탄일 뿐이다. 이를 가지고 열심히 홍보하라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시민은 이미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창호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김창호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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