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 공공칼럼

다시금 떠올려지는 무위당
“곡신불사谷神不死”,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로 풀이되는 구절이 있다. 『도덕경』 6장의 구절이다. 계곡의 신은 여성성을 표현한 것으로 도道에 대한 은유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도라는 것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만물이 비롯됐다는 도가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그래서 계곡의 신은 세상의 뿌리라고 일컫는다고 연이어 말하고 있다. 이어서 계곡의 신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겨우 있는 것 같지만,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도다[綿綿若存,用之不勤]”
- 최진석, 2001,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71쪽 -

계곡의 신을 바라보면, 무위당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의 모습이 떠오른다. 계곡의 신으로 상징되는 도道의 위격으로서의 장일순의 모습이 아니라, 도道의 작용 모습이 지금의 장일순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장일순은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도 겨우 있는 듯하지만, 다양성을 품고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물론, 몰아세우며, 덮어놓고 무위당 장일순이 최고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는 그가 생전에 강연에서 말했던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그의 죽음 이후로 28년여 시간이 지났지만, 그를 흠모하고 따르는 사람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어떤 점이 아직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지금의 우리 사회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중에서도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의 문제가 지구적 차원의 대표적인 문제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불평등의 문제가 주요 문제로 거론된다. 이런 차원에서 생명과 협동이 핵심 가치로 제시된다.

이는 무위당 장일순이 활동했던 시기에 주요 문제로 다루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를 문명적 차원에서 해결해보고자 했던 선구자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장일순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가 그렸던 세계의 모습을 지금도 흠모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생명과 협동에 대한 사상적, 사회적, 문화적 등의 다양한 시도가 장일순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원주그룹(Wonju Group)’이라는 명칭처럼 집단으로서 다양하게 생명과 협동의 삶을 보여주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사료적으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엄연한 현실 앞에 특정 누군가가 이러한 움직임을 이끌었다는 선후先后 논쟁이나, 특정한 개념을 선취해 이를 전용하고자 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고 했던가, “달을 봤으면 손가락은 잊어버려야”한다. 생명과 협동의 가치가 지향하는 곳은 선후, 시비, 진위의 문제를 논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곳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과 협동에 대해 장일순은 어떻게 접근했는지가 문제다. 이에 대해 그는 “공생이 길이다[共生是道]”라고 답한다. 장일순에게 공생共生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더불어 사는 것이나, 자연과 인간의 함께 가야 하는 조화로운 생태의 모습도 보인다. 이것이 노자의 무위無爲와 중층적으로 겹칠 때 다양한 논의로 전개된다.

최근 장일순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이 길[共生是道]’이라는 사상

무위와 섬김의 리더십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했던 장일순에게 그가 ‘어떤 리더십을 행했는가’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여기에서 사소한 문제이지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김소남의 연구에 따르면 원주그룹 내에서도 1세대로 분류되는 그는 리더였음이 자명해 보인다(김소남, 2017, 『협동조합과 생명운동의 역사』, 소명출판). 다만, 그가 어떤 이들을 이끌었는지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련 행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폭이 넓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에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장일순은 타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그의 리더십을 다루고자 한다.

노자로서 장일순을 바라보는 것이 본 고의 주제이기에, 그가 펼쳤던 리더십은 기본적으로 무위無爲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위無爲는 작위가 없다는 뜻으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개념화한 것이다. 노자에서 무위의 리더십을 언급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은 17장이다. ‘최고의 정치는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을 안다’라고 하며, 심지어는 ‘스스로 그렇게 됐다’고까지 말한다. 이는 노자의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무위無爲했더니 하지 않은 것이 없이 됐다[無不爲]는’ 노자의 테제가 담겨 있는 말이다. 노자의 ‘무위하니 무불위됐다’는 주장의 방점은 바로 무불위에 있다. 그것은 무불위를 위해서는 행위자의 주체성이 핵심이라는 것을 의도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장일순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욕심이 없이 자연을 따라서 하늘이 시키는 대로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행하면, 그러니까 천연에 자연의 도리에, 또 도道에 합당하게끔 행하는 것이 무위인데, 그렇게 행하면, 그러면 무불치라, 모든 것이 다스려진다 이 말이야.”
- 장일순,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74쪽 -

인용문에서의 욕심은 사회적 가치 기준이나 외부에서 비롯된 형태의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를 배제하고 내면의 목소리인 ‘하늘이 시키는 대로’해야 모든 것이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행위자의 주체성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장일순의 교육에 대한 지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자의 말 없는 가르침인 불언지교不言之敎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가르친다는 건 상대가 모르는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미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나오게 돕는 것이라는 말이거든. 그게 노자의 불언지교와도 통하는 거라.”
- 장일순,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72쪽 -

이런 점에서 행위자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일깨우는 것이 그의 교육이자 나아가 리더십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장일순만의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도에 대한 인식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됐던 ‘자연의 도’, ‘하늘이 시키는 것’, ‘아버지의 말씀’이 모두 하나의 층위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현상계에서 살다 보니 여러 대상을 만나게 되지 않는가? 사람도 만나고 동물도 만나고 식물도 만나고 또 무기물도 만나고, 이렇게 여러 가지 실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러 가지 가운데 말이지. 하느님을 아니 모신 것이 없잖은가? 생명은 오직 하나인데 나타나는 모양이 가지각색인 거라. 그러기 때문에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말을 할 적에 연장자에게는 ‘모신다’는 말을 쓰고 연하자나 평교자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쓰는데, 말은 그렇게 달리하지만 근원에서는 모두를 섬기는 거지.”
- 장일순,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133쪽 -

장일순은 천주교 신자이다. 노자의 도道에 대한 그의 인식은 종교적이며 신학적이다. 따라서 도道에서 만물이 비롯됐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이 비롯된 것은 대위법처럼 같은 선율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그의 리더십은 인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동식물을 포함한 무기물까지 포함된다. 온 우주를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은 리딩(leading)의 리더십이 아니라, 섬김(serving)의 리더십인 것이다.

생명은 하나
섬김의 리더십은 마치 구도자의 모습일 듯하다. 그래서 장일순은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하는가 보다. 그의 일화를 담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2016)를 보면 그의 섬김의 리더십은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 섶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萬象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시 생각하게 됩니다.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작은 미물의 거짓 없는 소리는 다름 아닌 생명에 대한 각성이다. 경쟁과 투쟁이 아닌 협동으로서의 공생에 대한 자각이다. 그래서 그는 해월 선생을 뜨겁게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해월 최시형 선생(海月 崔時亨, 1827~1898)은 동학의 2대 교주로 동학의 생명관을 확립하는 삼경三敬사상을 내놓는다. 삼경은 우주가 ‘한 기운 덩어리, 또는 한 기운 울타리’라는 것을 전제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밀알이 돼 한살림이 만들어진 것은 <한살림선언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장일순은 해월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해월의 피체지에 비석을 세우고 기념식도 주관했다.

비석에 쓰인 글씨는 무위당 장일순의 글씨다. 비석에 새긴 해월 선생의 글은 다음과 같다.

“天地卽父母요 父母卽天地니 天地父母는 一體也니라(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하나다)”

앞에서 장일순은 천주교 신자로서 종교적 면모를 엿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동학적인 면모도 보인다. 종교적 가치 역시 생명의 하나라는 측면에서 천주교와 동학이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장뿐만 아니라 불교 역시도 그의 생명의 테두리 안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난을 치되 반드시 난이 아니라 이 땅의 산야에 널려있는 잡초에서부터 삼라만상이 다 난으로 되게 해서, 시나브로 난이 사람의 얼굴로 되다가 이윽고는 그리고 부처와 보살의 얼굴로 되게끔 쳐보는 게 내 꿈일세.”
- 김삼웅, 2019, 『장일순 평전』, 두레, -

서예가로 일가를 이룬 장일순의 대표적인 작품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의인란擬人蘭이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사람의 얼굴을 특징화한 것은 흡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인자함까지도 엿보인다. 이러한 작품 세계는 위의 장일순의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변부로서 소외된 잡초까지도 자애로움으로써 섬김으로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자초가 결국은 부처와 보살의 얼굴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생명은 하나로서, 공생에 대한 각성을 극대화시킨 언설이라 할 수 있다.

수동적 적극성
이제 관건은 ‘어떻게 하면, 생명을 하나로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장일순에게 생명을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는 틀은 바로 ‘자기 부정’에서 출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서 ‘나의 것’이라고 하는 그 모두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나’를 비우면 끝에 가서 남는 게 진정한 ‘나’인데 그것이 바로 너[汝]요, 그것이 바로 아버지다. 이 말이지. 이 말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화두로, “여하시 부모미생전 본래면如何是 父母未生前 本來面”이라는 말이 있는데, 네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던 네 참모습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이지. 그게 뭐겠는가? 그게 바로 공空이요, 그게 바로 너[汝]라는 거지.”
- 장일순,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108~109쪽 -

자기 부정은 생명을 하나로 인식하기 위한 수련이다. 바꿔 말하면, 도道를 향한 구도의 길이자 수도의 길이다. 그 구심점은 생명을 인식하는 나라고 하는 주체인데, 모순적이게도 철저한 주체의 자기 부정을 통해서 원하는 바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너[汝]’나 ‘아버지’, ‘공空’은 자연이자 우주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 긍정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예수가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참된 자기를 얻는데 그 참된 자기라는 게 뭐냐 하면 우주의 본체와 같은 것임을 깨닫는 거라. 그러니까 여기서 ‘신비로운 수동성’이란, 위대한 자기 긍정에 이르도록 하는 철저한 자기 부정을 말하는 것이다.”
- 장일순,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삼인, 108쪽 -

장일순에 따르면, 속된 인간이 참된 자리인 자연 및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인위적인 행위 때문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자기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위적인 행세를 한다고 하는 그 자체는 뭐냐 하면 자기 욕구를 채우자는 것밖에 안 되고, 그러자면 결국 자연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고 말거든, 따라서 자연의 법도를 어기게 되고, 어기게 되니까 오늘의 이 산업 문명이 결정적으로 자연의 순환 질서를 망가뜨리고 있잖은가? 그것이 파괴되면 인간 스스로 아무리 오래 살려고 해도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지”
- 장일순, 2003,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70쪽 -

이러한 장일순의 인식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농약 중독으로 인한 생태위기문제를 인식했고,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농촌의 붕괴와 노동계의 불평등한 측면을 문제로 보았다. 그에게 이러한 문제들은 개별적 사건들의 각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문명의 그림자로 진단했다. 서구의 인간중심주의가 낳은 문명의 폐해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그동안의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분리하고 대상화해 수단으로 인식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시각에서 문명의 전환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동적 적극성”이라는 개념어를 낳게 됐다. 인간의 인위적인 것을 소거하면, 행위자의 주체성이 드러나는데, 그는 이를 “신비로운 수동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무위의 시각에서 작위 없음을 ‘수동성’이라는 새로운 말로 표현했다. 이러한 수동성이 무위의 차원에서 이뤄진다면 그것은 행위자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발휘된 것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노자의 무위無爲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를 ‘수동적 적극성’이라는 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상존한다. 행위자의 주체적 측면은 얼마나 천리天理에 순응順應하고 순천順天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주체적이기는 하지만 독립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못 미치는 한계도 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
이 글은 노자의 측면에서 장일순을 보고자 했다. 특히 생명은 하나라고 하는 그의 인식과 더불어 보고자 했다. 무위는 때로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발휘됐고, 때로는 ‘공생’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이는 나아가 ‘수동적 적극성’이라는 개인의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용어로 거듭나기도 했다.

새로운 말을 통해 개념화할 때, 필요한 것은 어떤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느냐를 분석하기보다는 어떤 시대 인식을 통해 시대에 어떤 물음을 던졌느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장일순에게 이러한 물음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구축해 하나의 사상적 구조물을 체계적으로 남겨놓지 않았지만 그의 파편화된 언설을 모아보면, 이러한 시대의 물음은 자못 분명해진다. 담박하지만 그의 물음 다름 아닌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다. 이것을 두 단어로 풀어쓰면 생명과 협동으로 읽힌다.

이렇게 새 말을 통해 이전과 달리 새로워진 그의 몸짓은 세상에 ‘한살림’이란 조직으로 내놓았다. 물론 서화나 일상의 이야기 등에서도 그의 몸짓은 분명 그의 새로워진 말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물음이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하다. 이 때문에 계곡의 신으로서 장일순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김재익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김재익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저작권자 © 더퍼블릭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