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 공공칼럼

악마가 프라다를 입을 때: 한 여성의 성공 문법
한때 미국에서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리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미모의 젊은 백인 여성 경영자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홈스(Elizabeth Holmes, 1984년생)는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지만 미국에서는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온 인물이었다. 그녀가 일약 스타로 떠오른 것은 스탠퍼드 대학에 재학 중인 19세에 바이오 기업인 테라노스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창업과 더불어 그녀는 의료계를 뒤흔든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손가락 끝에서 채취한 몇 방울의 혈액만으로 250개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기를 개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스탠퍼드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이 그 결과를 보증하는데 동원됐다. 어릴 때부터 성공 지향적인 그녀가 이 제품에 붙인 이름도 당돌하게 ‘에디슨’이었다.

이런 성과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언론이었다. 그녀가 ‘에디슨’을 상용화했다고 발표하자 여러 언론이 띄우기에 나섰다. ‘포춘’, ‘포브스’ 같은 저명한 저널들도 그녀를 신격화하기에 앞장섰다. 이어 실리콘벨리의 막대한 자금이 몰렸다. 재벌기업 루퍼트 머독과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 등 내로라하는 투자가들도 참여했다. 한화로 약 1조 원이 넘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에 버금가는 혁신 사업가로 대접받던 그녀를 무너뜨린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띄우기에 여념 없었던 ‘월스트리트 저널’의 한 기자의 탐사보도였다. 퓰리처상 수상자였던 그 기자는 제보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그녀의 주장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소됐고, 2022년 1월 미국 법원에서 비로소 유죄 평결을 받았다.

그녀의 사기행각에 유독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놀랍게도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들이 미모의 젊은 그녀를 띄우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와 조지 슐츠, 트럼프 정권의 국방부 장관 제임스 매티스가 그녀를 적극 후원했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와 빌 클린턴은 물론, 현직 대통령이었던 존 바이든 대통령마저 그녀를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누가 파시즘을 키우나
하지만 이런 문법이 한 백인 여성의 사기행각에만 적용될까? 우리 경우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언론과 지식사회에 회자됐던 저명인사가 갑자기 나락의 길로 들어선 경우들을 우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인물을 띄우기에 여념 없었던 언론과 저명인사들은 거꾸로 그를 물어뜯기에 앞장섰다.

정치사회는 공적 영역에서 주요한 의사를 결정하는 공간이다. 이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기행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편이다. 장관을 포함한 정부의 주요 직책에 대해서는 청문회를 통해 검증하는 절차를 거친다. 하지만 이들을 검증하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느슨한 편이다.

대중의 표로 먹고사는 선출직 정치인들 사이에는 이 같은 위장·과장, 심지어 사기행각은 다반사로 발생한다. 특정 정치인의 사기행각마저 영웅적 행위로 위장·포장하거나 작은 성취를 마치 커다란 성과인 양 과장하기 위해 저명인사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언론도 그들을 신격화에 나서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정치적 참여가 자유로운 소셜 미디어 시대에 이 같은 일은 더욱 용이해졌다. 가짜뉴스로 만들어진 인물이 제도에 진입해 정치적 괴물로 성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도에 이미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정치 명망가들이 자신의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그 인물을 제도 속에 끌어들여 괴물이 되는 데 기여한다.

특히 소셜 미디어 시대에 갑자기 부상하는 정치적 인물은 대체로 정치적 극단주의를 선택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과의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진보든 보수든 극단적 정치 세력의 상호 적대적 관계를 통해 정치적 자산을 비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려 한다. 극단주의 정치 세력들 사이의 ‘적대적 의존관계’야말로 소셜 미디어 시대의 우울한 정치적 자화상이다.

문제는 ‘적대적 의존’에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의 정치적 성격은 대체로 파시즘적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각 정파의 정책 및 정치적 주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각자가 처한 조건과 사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적대적 의존관계로 그 영향력을 확대, 유지하려는 극단주의 정치 세력들이 보여주고 있는 파시즘적 정치행태가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본질이 폭로돼 시민이 인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수 있고, 그것 또한 소셜 미디어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제는 제도 속에 정치적 세력으로 자리 잡은 파시즘적 경향을 극복하는 데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기간의 정치적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의 몫으로 전가될 뿐이다.

두 개의 파시즘
파시즘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다. 군대, 검찰, 경찰, 정보기관을 동원해 개인의 인권과 자율권을 억압하는 정치적 행위들이야말로 파시즘의 전형이라 생각한다. 나치의 처절한 인종청소나 공산주의 아래서 집단주의가 가져온 정치적 현상들을 파시즘으로 떠올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같은 경험은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리 멀지 않은 군사독재 시절 군부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박탈하는 데 주저 없이 공권력을 동원했다. 이 같은 정치적 파시즘을 극복하는 데 오랜 민주화 투쟁을 거치는 등 적지 않은 기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파시즘은 완전히 극복됐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의 파시즘 경험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구조적으로 내재화됐다. 내재화된 파시즘의 ‘추억’은 우리 사회에 시대착오적 환상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아직도 ‘공권력에 의한 통치’는 여전히 보수 정치 일각을 움직이고 있다. 물론 그것이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집권 세력이 치닫고 있는 사법 정치도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오늘날 파시즘은 이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공권력 통치’가 아니라 ‘강제된 시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권력이 구축,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과거 파시즘도 대중적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을 취했다. 나치는 독일 국민의 불안을 극대화해 국민의 동의를 획득,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권력의 미학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시민을 동원해 권력 기반을 공고화해 나갔다.

‘강제된 시민적 동의’는 특히 소셜 미디어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정치적 위험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깨어있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이상적 상태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고, 그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적 조건(‘깨어있는 시민’)도 지난한 노력과 헌신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그만큼 성공하기 어려운 제도이다. 이 같은 노력과 헌신,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긴장감 없이는 ‘반성 없는 개인들의 집단 최면’에 항상 노출되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팬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민주주의 위기 : 참여가 언제나 정의인가
2차 대전 이후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화두였다.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신생 독립국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적으로는 공산주의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내적으로는 군사쿠데타나 독재를 거쳐야 했다.

민주주의 제도가 어느 정도 안착한 1980년대를 들어서면서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세계화를 통해 세계는 자본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소비에트나 중국마저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시장에 통합됨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 패권은 더욱 공고화돼 갔다. 이와 아울러 불평등은 세계적 수준에서 새로운 쟁점으로 등장했다. 불평등의 문제가 세계화와 함께 단순히 한 국가의 문제를 넘고 넘어 세계적 수준으로 심화·확대됐다.

실질적 민주화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었다. 민주주의의 제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의한 세계화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민주주의 위기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세계화를 통한 자본 패권에 대한 시민적 저항도 세계화되기 시작했다. 자본 패권에 저항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참여와 연대’였다. ‘민주주의 위기’는 오직 ‘더 많은 참여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지점에서 한국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주어진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은 1997년 IMF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본격적으로 자본에 의한 패권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화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제공하는 긍정적 기여도 있었다. 자본 패권의 세계화 수단이었던 인터넷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 소통 통로를 마련해줬다.

새로운 미디어 등장은 새로운 정치 세력 등장을 동반한다. 신문이 활자 중심의 권력관계를 창출했다면, TV는 시각을 중심의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었다. 이 같은 변화의 결정적 사건은 바로 1960년대 젊은 정치신인 존 F. 케네디 등장이었다. 한국에서 인터넷 등장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냉전주의나 지역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대중들이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화의 한 수단으로 정착한 인터넷이 한국에서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가져온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고학력자들이 대거 정치사회에 유입됐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은 학생운동 지도부가 이미 의회에 진출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학생운동 지도부의 의회 진입은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의 참여였다면,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세력의 진입은 우리 사회의 사회, 정치, 문화적 변화를 수반한 것이었다.

이들의 참여는 민주화가 지연되고 있었던 우리 정치사회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세계화와 더불어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았지만, 정치적 동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들의 참여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동력을 부여했다. ‘노사모’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 참여가 폭발적으로 확대됐으며, 그 결과가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의 탄생이었다.

리더십의 위기 :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날 소위 ‘팬덤’ 현상과는 전혀 달랐다. 1970, 80년대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선진적인 소통 수단인 인터넷을 사용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그들의 분석은 기존의 언론을 넘어서고 있었다. 블로그 등 인터넷 미디어에서 그들은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깊이 있는 토론과 논쟁을 이어갔고 그 결과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팬덤과는 참여의 성격과 질적 수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양극단 정치 세력들이 ‘적대적 의존’을 강요함으로써 무반성적 ‘강제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팬덤은 ‘최면 상태에 빠진 반성 없는 개인들’의 동원된 참여의 성격을 지닌다. 참여의 내용도 ‘적대화 담론’ 외에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인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참여의 ‘질’과 ‘방식’이다. 필요한 것은 적대적 동원 구조 속에서 특정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안적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정치 참여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리더십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어젠다를 창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것이냐, 아니면 ‘적대적 동원구조’ 속에서 ‘무반성적 개인들’을 동원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리더십이다. 오늘날 시대적 담론이 ‘리더십의 위기’로 모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능의 함정, 누가 책임져야 하나
한국정치사회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참여의 빈곤’이 아니라 ‘리더십 빈곤’이다. 이 같은 위기는 현상적으로는 무능함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들은 스스로 유능하다고 자처한다. 몇 가지 행정적 성과를 내세워 자신의 유능함을 마케팅하는 데 특별히 유능한 정치인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정치적 유능함 대신 오직 ‘적대적 정치’를 조성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구축해온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유능함이란 특정 직능에서 보여줬던 업무의 효율성 정도라 할까?

정치적 유능함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어젠다 제시 능력은 기본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어젠다를 중심으로 시민을 설득, 참여시킬 수 있는 소통 능력 또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어젠다를 실행, 구체화하기 위해 우리 사회구조 및 시스템을 이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능력과 아울러 인격적 요소 또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어젠다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리더십도 도덕적 설득력을 갖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취임 100일도 지나기 전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인적 쇄신’과 ‘사법정치’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겠지만, 그것 또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불행하게도 이 같은 정치적 혼수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여당 내에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MZ세대를 대변하는 ‘싸움의 기술’도 정치적 유능함과는 별개이다.

또한, 정치적 무능함은 특정 정치 세력만이 아니라 정치사회 전반에 해당하는 진단이다. 위기에 빠진 것은 정부 여당뿐 아니라 야당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들 스스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정치적 무능함에도 우리 사회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이룩한 여러 성과가 구조적으로 내재화돼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무능함에는 소위 정치적 명망가들과 언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언론을 빙자한 정파 매체들의 선동정치 또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악마에게 프라다를 입혀 괴물을 만들어 냈던 성공 문법은 우리 정치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진영논리에 동원돼 특정 후보를 내세워 이기는 데만 골몰했다. 리더십과 정치적 유능함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승리를 방해하기 위한 ‘수박’들의 전략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치적 무능함이다. 누가 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일까?

김창호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김창호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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