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정책제안

보충성 원칙과 다른 원칙 간의 마찰 문제
복지국가의 핵심인 사회보장체계는 사회보험, 사회수당, 사회서비스, 사회규제 그리고 사회부조(또는 공공부조) 등의 제도들로 구성된다. 이 제도적 요소들은 서로 구별되는데, 특히 사회부조가 보여주는 특이함은 보다 크고 명확하다. 무엇보다도 사회부조제도의 구성 및 운영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보충성의 원칙은 다른 제도적 요소들에 공통적으로 토대를 제공하는 여러 원칙과 마찰을 일으키며 제도적 요소 간의 정합성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사회부조(또는 공공부조)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이 있나
정합성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사회부조와 보충성원칙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무총리 산하 사회보장위원회는 사회부조를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에게 국가의 책임하에 직접 금품을 제공하거나 무료 혜택을 주는 제도로서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최후의 안전망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라고 규정하고 있다(사회보장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https://www.ssc.go.kr/menu/info/info030103.do). 이 규정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풀어서 이해하자면, 사회부조는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계층, 즉 당장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을 대상자로 하며 보통 자산조사(mean test)를 통해 이들을 선별한다. 국가는 이들에게 최소 수준의 생계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급여를 현물 또는 현금으로 제공한다. 이 급여는 일반조세를 통해 마련하며 급여의 결정 및 운영은 국가가 담당한다.

그리고 최저생활의 보장이라는 목표가 상정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부조제도로는 생계급여, 의료급여, 주거급여, 교육급여 등으로 구성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긴급복지지원제도, 노인맞춤돌봄서비스 등이 있다.

사회보장체계에서의 보충성 원칙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보충성을 의미하는 ‘subsidiarity’라는 용어는 ‘보충하다’, ‘예비군을 만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인 ‘subsidior’에서 파생됐다. 그리고 라틴어 ‘subsidium’은 ‘예비의 상태에 있는 물건’, 즉 부족이 발생했을 때 이를 메워주기 위해 사전에 준비해두는 물건, 특히 ‘예비군’를 의미했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 이 용어는 사회를 새롭게 조직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16세기의 유럽은 절대주의, 즉 왕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었는데, 이런 흐름에 대항해 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흐름이 발생했다. 이러한 대항 흐름의 맥락 속에서, ‘subsidiarity’는 권력과 권위의 분산을 지칭하는 핵심 키워드가 됐다(Pierpaolo Donati, “What Does “Subsidiarity” Mean? The Relational Perspective”, 『Journal of Market & Morality』, Volume 12, Number 2,).

보충성 원칙에 따른 사회부조를
사회보장의 원칙에 부합하는
다른 제도들로 대체해야 해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보충성(subsidiarity)은 사회 내의 조직체들(개인, 가족, 친목 단체, 마을, 기업, 협동조합, 사회단체, 지방정부, 중앙정부) 간의 관계를 조직화하고, 이들 사이에 역할을 배분하는 원칙으로, 3가지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역할 배분에 있어서 소규모 단위가 일차적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둘째, 대규모 단위는 소규모 단위가 수행할 수 없거나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업무만을 담당한다. 셋째, 소규모 단위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 경우에 한해, 대규모 단위가 해당 업무의 수행을 대신하거나 소규모 단위에 도움을 제공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내용들은 보충성의 핵심적인 의미로 자리 잡게 됐다.

보충성은 사회보장영역의 조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회보장이란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필요들을 상부상조나 협동 등의 연대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보장체계를 조직화할 때, 근원적 필요들의 충족에 있어서 개인이나 가족 등이 우선권을 가지며, 개인이나 가족 등이 충족시키기 어려운 것들에 한정해 국가 역할이 규정되고, 개인과 가족 등이 시도했음에도 실패한 경우에는 국가가 이들을 대신해 필요의 충족을 위한 일들을 떠맡는다는 원칙이 성립됐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일반적인 보충성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통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나 자율성 등의 확보가 핵심인 반면, 사회보장 영역에서는 필요의 충족에 대한 책임이 핵심이 됐다. 즉 자율의 주체가 책임의 주체로 변경된 것이다.

보충성원칙은 사회보장의 원칙들과 대립된다
특히 보충성의 원칙은 사회부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에 따르면, 개인이나 가족 등의 소규모 단위는 생계유지라는 필요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 즉 자구의 노력을 기본으로 하며, 이 노력이 실패했을 경우에만 국가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급여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사회보장이 기반하는 여러 원칙과 마찰을 빚는 문제를 일으킨다.

우선, 자구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부담하고 책임진다는, 즉 상부상조나 협동을 통해 각자의 생계유지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연대의 원칙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버린다. 많은 사람은 개인이 최소한 먹고 입고 자는 것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상부상조나 협동은 ‘백지장도 맛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상대적으로 손쉽거나 삶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사안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사회보장이다.

생계유지 필요의 충족을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은 이 필요의 충족을 가로막는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고려를 중시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사실 생계유지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바가 매우 크다. 취업이 되지 않는 것은 개인이 무능하기보다는 대내외적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은 이러한 사회적 요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따라서 생계유지 필요의 미충족에 대한 책임 또한 사회구성원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보충성의 원칙은 이러한 맥락과도 대립된다.

보충성의 원칙에 따르면, 국가나 사회의 개입은 자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요의 충족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 한정해 이뤄진다. 이는 국가의 대응이 대응 시점의 측면에서 이차적 또는 후속적으로 이뤄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회보장은 필요가 발생하면 그 즉시 대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는 매일 영양분을 흡수해야 하고 여기저기로 이동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안락한 주거환경에서 휴식과 숙면을 취해야 하며 타인들과 통화를 하고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정보를 획득해야 하는 필요에 놓인다. 사회보장은 매일 반복되는 생계유지의 필요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해 필요가 충족되도록 한다. 그러나 보충성의 원칙은 필요가 발생하면, 먼저 자신이 가진 소득과 자산으로 이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국가의 개입은 그 후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보장과 사회부조의 대응 시점이 서로 다른 것이다.

또한 사회부조의 보충성원칙에 따르면, 국가의 도움은 개인이 자구노력을 해도 안 되는 ‘부족분’을 채운다. 하지만 이러한 ‘부족분 채우기’는 사회보장이 기반하는 ‘필요에 따른 급여제공의 원칙’에 대립된다. 사회보장은 필요가 발생하면 그것을 충족시키기에 적절한 급여를 제공함으로써 부족분을 채워야 하는 일을 피해간다. 건강보험의 경우, 부족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필요의 크기가 10만 원이든 1천만 원이든 간에 그것에 맞춰서 급여를 제공한다. 오히려 전체 비용 중 부족한 부분을 개인이 사비로 담당하게 돼 있다.

보충성원칙은 복지국가와 사회보장에 대한 오해를 낳고 장애물이 된다
그리고 사회부조가 낳는 부정적 효과도 간과할 수 없다. 사회부조는 복지국가나 사회보장체계에 대한 일반적인 상을 혼란스럽게 한다. 특히 사회부조의 원칙인 보충성의 원칙이 복지국가나 사회보장체계의 주된 원칙이라는 오해를 양산한다. 이러한 오해는 보충성의 원칙이 여기저기서 실제로 작동하거나 그것이 보다 더 강조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보충성의 원칙이 사회에서 얘기되지 않는다면 또는 사회부조 제도들이 없다면, 사회보장에 대한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더 나아가 정치인이나 행정부처가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것은 사회부조제도들을 더 만들거나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만약 사회부조제도가 없다면 정책적 대안은 사회부조가 아닌 사회보장의 것들로 채워질 수 있다. 사회부조제도라는 대안의 존재 자체가 사회보장에 토대를 두는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정책결정을 할 때, 언제나 사회부조라는 잘못된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보충성원칙은 폐기하고 사회부조는 보편적 보장체계로 대체돼야 한다
앞서 보았듯, 보충성의 원칙이 사회보장의 원칙들에 대립되고 부정적 효과를 낳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보장체계의 내적 정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보충성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폐기돼야 한다. 사회보장의 원칙들은 이미 각국의 헌법을 통해 복지국가의 원칙으로 자리 잡아 제도화를 달성했다. 보충성의 원칙은 이 원칙들을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모순의 불씨일 뿐이다.

그리고 보충성의 원칙에 기반한 사회부조제도들은 사회보장의 원칙들(보편성의 원칙, 즉각적 대응 원칙, 연대의 원칙)에 기반한 제도들로 대체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매일 반복적으로 생계유지의 필요에 마주한다. 바로 이 필요의 충족을 위해 최소수준의 소득을 상부상조나 협동의 방식을 통해 확보하도록 하고, 이러한 확보가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 제도를 발명해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논의됐던 기본소득제는 좋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제도 중 교육제도, 고용 창출을 위한 제도, 고용유지를 위한 제도, 최저임금제도, 임금협상제도, 고용보험 등도 모두가 실질적으로 최소수준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효과를 낳고 있음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최소수준의 소득보장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위해 여러 개의 제도가 중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부조를 대체할 제도의 구상은 보다 많은 숙고가 요구된다.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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