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학 공공철학

신성한 차별
한국의 헌법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정법으로서의 차별금지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1997년의 일이다. 그러나 근 25년이 지난 2022년 현재까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은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차별받지 않아야 할 대상의 범주 가운데 하나로 ‘성 소수자’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종교계 일부에서 문제 삼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수 성향의 개신교 단체들의 반대 활동은 지속적이고 맹렬하다. 이들은 동성애는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죄악이며, 성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곧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모든 개신교인이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동성애 혐오의 근거로 이용돼 온 성경 구절들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이뤄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히브리성서(구약성경)의 <창세기>에 포함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다. 신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이 도시들을 멸망시키려는 마음을 먹고 두 명의 사자를 소돔으로 보낸다. 소돔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이 낯선 이방인들을 환영하며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자 온 성의 사람들이 롯의 집을 둘러싸고는 신의 사자들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들을 강간하기 위해서였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소돔 사람들은 ‘남성’인 천사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려고 한 것이므로 소돔의 죄악이란 다름 아닌 ‘동성애’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성’이 아니라 ‘성폭력’ 쪽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손님을 환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고대 사회의 규칙을 어기고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폭력을 행한 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교리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해석한다면 우스꽝스러운 모순이 생긴다. 만약 신의 사자들이 (천사에게도 성별이 있다는 전제하에) 여성이었다면 소돔 사람들의 행위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이 돼버리지 않는가.

그러나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런 식의 대안적 해석을 번역,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이 분야의 연구서인 『퀴어성서주석』의 한국어역이 출간되자, 몇몇 교단들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고, 번역에 참여한 인사들을 이단으로 몰기도 했다. 또한 세계의 많은 개신교 교단들에서 성 소수자는 목회자가 될 수 있으며,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개신교 목회자가 교단의 징계를 받는 사건이 최근까지도 일어나고 있다.

이제 한국 개신교에서 스스로 성 소수자이거나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반대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에서 배제당할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됐다. 그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2010년대 초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운동에서 등장한 “종북 게이”라는 용어다. 이는 보수 개신교의 오랜 슬로건인 반공을 보다 현대적인 이슈인 성 소수자에 대한 공격과 결합시켜 놓은 단어다. 흔히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을 ‘사랑’이나 ‘믿음’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이들에게는 동성애 반대야말로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신앙의 핵심적인 실천이다.

다문화 사회와 그 적들
이처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혐오의 근거로 삼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타자의 종교가 혐오의 이유가 되는 경우도 있다. 대구 대현동에 무슬림 유학생들을 위한 모스크가 건축되기 시작하면서 촉발된 이슬람 혐오가 그 예다. 지역 주민을 포함한 반대 세력은 동네에 무슬림들이 모이면 “소음”과 “악취”가 심해지고 불안감이 조성될 것이라며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예멘과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으로 난민이 발생하자, 이들의 수용을 반대한 이들 또한 그들의 종교를 문제 삼았다.

이슬람 혐오 담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슬림을 “테러리즘”이나 “전쟁”과 연결시키는 선동이다. 전 세계 인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집단에 대한 대중적 편견이 이처럼 강고하게 유지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게다가 이슬람 혐오는 비서구 출신 이주민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의식과 결합돼 있다. 여기에는 “가난한 나라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자국민의 몫을 빼앗아간다는 극우적 주장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도 있다. 그들은 단순히 외국인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종교의식을 하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그렇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이슬람 혐오는 다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는 과제와 전면적으로 충돌한다. 고령화와 출산 감소로 인해 한국의 인구 구조 불균형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노동, 교육, 결혼 등 모든 영역에서 이주의 확대는 이제 윤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의 지속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일이 됐다. 기존의 다문화 담론은 이주자들에게 한국문화를 배우게 해 동화시키는 방향에 가까웠다. 그러나 본격적인 다문화사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국인들 쪽에서 이주민의 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배우며 공존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이주자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 점에서 다문화사회란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 살거나 한국인이 되기 위해 자신들의 종교적 관행을 포기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말한다. 무슬림 이주자들에게 김치를 먹이고 차례상에 절을 하도록 하기보다는, 할랄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슬람 사회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이 아닌 한국인 이슬람 개종자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8년 한국이슬람교중앙회의 조사에 의하면 이주민을 제외한 한국인 무슬림은 6만 명 정도이다. 이것은 증산계 종교들이나 천도교 인구에 필적하는 수치지만, 대부분 종교인구 통계에서는 ‘기타 종교’로 분류돼 있어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 ‘한국인 무슬림’은 대다수 한국인의 사회적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들의 존재는 이슬람을 특정한 지역, 민족, 인종 집단과 연결 짓는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종교는 왜 혐오하는가
왜 종교는 이처럼 성 소수자,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쉽게 결합하는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종교는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완화시키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간을 비롯한 사회적 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 타자에 대한 혐오는 자연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다. 유인원을 대상으로 한 실험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원래 한 무리에 속했던 개체들 가운데 하나를 동료들과 분리해서 냄새나 외모를 조금 바꾼 후 원래의 무리에 합류시킨다. 그러면 ‘다수’에 속하는 개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그 ‘소수자’를 따돌리고 폭력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타자를 분류하는 방식은 좀 더 복잡하다. 종교적 정체성은 젠더, 민족, 인종 등과 함께 우리가 다른 인간을 분류하는 지표 가운데 하나다. 자신과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거나 의례적 실천을 하는 사람들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거나 직접적인 린치를 가하는 것은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대로 다른 지표에 의하면 이질적인 타자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자신과 같은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차별의식은 일반적으로 줄어든다. 이처럼 종교적 정체성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타인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종교에 기반을 둔 차별을 거부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법률로 정해 두는 것이다.

종교에는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지표가 된다는 것 말고도 중요한 기능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도덕적 가치나 미적 취향에 신성함의 옷을 입혀서 항구적이고 절대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옳고 그름,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은 개개인의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문화적인 구조에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종교는 그런 구조 가운데 하나이면서, 한 가지 특수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다수 집단, 혹은 지배 집단의 윤리적, 미적 취향을 절대적인 신의 명령이나 우주적인 원리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이를테면 종교는 특권 계층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는 것을 정당화해주거나, 기존의 권위에 반대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왔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여성혐오의 근거를 제공해 온 것도 그런 이유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들에서 종교 교리의 언어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비하하거나, 반대로 여성성 자체를 신성하고 고귀한 것으로 치켜세운다. 어느 쪽이든 현실의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대상화된다. 일례로 인도의 라지푸트족은 체계적이고 열광적인 여신 숭배 전통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힌두교 집단들 가운데 가장 가부장적인 문화를 갖고 있기도 하다. 신성시는 혐오의 다른 측면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여성성을 찬미하는 남성 작가들의 작품들이 여성 표상을 ‘모성’이나 ‘성애’에만 제한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성스럽고 자애로운 어머니’나 ‘순결하고 아름다운 성처녀’에 대한 숭배는 가부장적 사회일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공공성을 위협하는 종교적 혐오
공공성의 차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특정 종교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 사회 일반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는 지배 체제에 밀접하게 결합해 있었던 지배 종교들이 공적 영역에서 분리되는 일반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이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세속화’다.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한편으로 종교의 공적인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개인의 정체성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됐고 세속 정부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회 세력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혐오의 역사에서 보면 이것은 확실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몇몇 예외가 있지만, 이제 세속화된 근대 국가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차별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게 됐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와의 결합에서 벗어나 지구적인 확산을 추구하는 ‘세계종교’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주의 시기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이질적인 종교문화를 가진 집단들을 구원의 여지가 없는 사악하고 야만적인 자들로 몰아 공격하기보다는, 그들을 개종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신자로 보는 게 이익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역할이 그 고유한 영역 속에 제한돼야 한다는 원칙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근본주의, 원리주의 등으로 불리는 운동들에서는 정치적, 윤리적, 심지어 법적 영역에서 자신들의 종교 교리가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종교공동체를 대단히 강력한 규율로 규제하는 한편, 그런 사고방식이나 생활 형태가 사회 일반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근본’이나 ‘원리’란 전통적인 교리 가운데 일부를 다원적이고 세속화된 사회에 반발하는 형태로 확대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외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장되고 기괴해 보인다.

종교집단이 대규모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강력한 의무로 구속을 행사하면서 타자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그다지 합리적인 전략이 아니다. 다수 대중은 사회 일반의 규범과 지나치게 단절된 종교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는 느슨한 소속감을 가진 다수의 신자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외부사회와 격리된 교리적 신념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을 일정 비율 이상 유지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적, 문화적 보수성이 강화된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문제는 이들이 내부의 결속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특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의 힘이 약해진 이후에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스스럼없이 “종북”, “빨갱이”라고 불렀다. 또 이들은 성 소수자나 다른 종교인에 대해서 사회의 다른 집단들에 비해서 훨씬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혐오 발언을 하고 있다. 놀라운 일은 이들이 그런 혐오가 자신들의 신앙적 양심에 따른 일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사탄마귀”이기 때문에, 그들을 모욕하고 공격하는 것은 신성하고 영적인 전쟁의 일부가 된다.

근본주의, 원리주의의 특징은 대단히 협소하게 정의된 교리적 신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 일반에 최대주의적으로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탈레반, IS 등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은 테러리즘과 전쟁, 정권 장악을 통해 그런 욕망을 현실에 구현하려 하는 세력들이다. 적대적인 여러 개의 원리주의 집단이 하나의 사회 안에 동시에 존재할 때, 그것은 작게는 사회갈등과 상호 린치, 나아가 내전과 같은 파국적 상황으로 이어지기 쉽다.

한국은 특정한 지배 종교가 없이 여러 제도종교가 대등한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공존하는 다종교사회이지만, 아직 그런 정도의 심각한 종교갈등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 부분 종교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국가에 비해 열세에 있었던 권위주의 시대 이래의 구조 때문이었다. 만약 근본주의적 종교집단들의 결속력과 문화적 지배에 대한 욕망이 더욱 강해지고, 공공 영역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 불안한 종교평화는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혐오를 좋아한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이어 성적, 종교적 소수자를 다음 타깃으로 삼은 것은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인지종교학자 구형찬은 종교적 혐오가 인간 마음의 인지적 장치들에 ‘기생’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이들은 에이즈를 퍼트릴 것이라는 선동이 전형적이다.

이런 발언은 오염을 가능한 한 회피하려고 하는 마음의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켜서 강렬한 혐오를 일으킨다. 여기에 마찬가지로 강력한 종교적 신념을 결합시키면 혐오를 정당한 신앙의 실천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낯선 종교를 가진 외국인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마음은 낯선 냄새를 묻혀 온 동료를 따돌리는 유인원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이 투철한 신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혐오는 우리 마음에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값싼 인지적 ‘비용’을 지불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종교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가 혐오에 기생하는 것처럼, 혐오 또한 종교에 기생해서 살아남는다. 이 공생 관계에서 근본주의적 종교들은 많은 이익을 얻는다. 이를테면 내부의 결속,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와 같은 것들이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그들의 표를 의식해 차별금지법 통과를 주저하거나 혐오 발언에 동참할 때마다 그들이 느끼는 효능감은 종교적 열광의 형태가 된다. 그러나 혐오 세력이 그런 이익을 누리는 동안 혐오 당사자들은 소외감과 생존의 위험을 느낀다.

한편 혐오를 극복하기 위한 인지적 비용은 비싸다. 거기에는 성찰과 공감, 환대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분명 종교적 전통에는 그런 각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들이 풍부하게 포함돼 있다. 그러나 혐오하는 마음에 올라타는 손쉬운 길과는 달리, 타자를 환대하는 종교는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이것은 아무래도 장사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교세의 확장이 지상과제인 제도종교들이 택하기는 쉽지 않은 길이다. 종교와 혐오의 공생은 이어질 것이다. 대안은 불분명하다. 이미 혐오와 분리되기 힘든 종교 자체를 제거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떻게든 종교와 혐오의 결합을 끊어내야 하는가?

환대를 위한 정치
인간의 마음에서 타자에 대한 혐오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일부 종교가 그런 혐오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사회에서 종교 자체를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시급한 것은 종교와 결합한 혐오로 일상적인 차별과 사회적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한 정책적, 실천적인 노력이다. 법제적 차원에서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실현 가능한 것은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신속한 제정이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는 권력에 의해 종교적 신념을 침해받지 않을 자유이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혐오 발언을 하거나 부당한 차별을 할 권리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타 종교인이나 성 소수자를 비난, 배제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종교적 신념’의 수준으로까지 가지고 있는 집단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차별에 대한 금지와 표현의 자유라는 두 헌법적 원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혐오 표현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모욕이나 직접적인 폭력이 아닌 한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반면, 종교적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거의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차별금지의 법제화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시민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을 설정하는 일일 뿐이다. 더욱 근원적인 해결은 종교공동체의 내부에서 이뤄지는 성찰과 개혁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 전통들은 대단히 풍부하고 때로는 상호 모순되는 경전과 교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근본주의 집단은 그 가운데 극도로 편협하고 극단적인 내용을 골라내어 그것을 절대적이고 핵심적인 행동강령으로 삼는다. 따라서, 경전에 있는 말이니까, 교리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혹은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이니까 의심 없이 믿는 일은 바람직한 신앙조차 아닌 셈이다. 이 경우 신앙의 핵심에 있는 교조의 가르침은 좋은 지침이 된다. 예수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지, 특정한 이웃은 죄인으로 몰아 모욕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중앙정치에서의 법제화, 종교집단 내부의 각성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환대와 공존을 위한 지역사회 차원에서의 노력이다. 종교가 혐오 감정에 ‘기생’하지 못하게 하려면 지역공동체가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소수자의 존재 방식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은 대단히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차별은 타자의 속성 가운데 일부를 과장된 형태로 인식해 기피하는 ‘비인간화’로부터 시작된다. 이웃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해가 필요하고, 이해를 위해서는 대화에 나서야 한다. 정치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집단적인 노력이라면, 혐오와 차별로 가득한 사회가 되느냐 아니면 상호존중과 평화가 넘치는 사회가 되느냐는 온전히 지역공동체 영역에서 이뤄지는 정치의 몫이다.

한승훈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한승훈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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