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이야기

파사성에서 바라보이는 여주평야
여주는 역사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여강驪江 즉 남한강이 뿌려놓은 풍부한 충적토가 있기에 언제나 오곡이 잘 여무는 기름진 땅이다. 이 고을에 뚜렷한 지명이 나타난 것은 고구려 장수왕 64년(476)의 골내근현骨乃斤縣부터이다. 그 후 황여黃驪·여흥麗興을 거쳐 고려 우왕과 공양왕 때는 승격과 강등을 거듭하다가 1469년 세종대왕의 무덤이 왕대리로 천장遷葬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 고쳐 불린 이후 현재까지 여주라는 이름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여주 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있다. 바로 여주 이포보 부근에 자리 잡은 파사성이 그곳이다. 파사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석축산성으로 신라 제5대 임금 파사왕 때 처음 쌓았고 임진왜란 때 승장, 의엄이 승군을 모아 성을 수축했다고 전해지는 파사성은 남한강 상류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여주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새 중의 요새이다. 부근에 천서리 막국숫집이라는 유명한 맛집이 있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지만 실제 파사성까지 올라가는 사람 수는 적다. 그런데 최근 발굴과 정비사업이 이뤄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진 장소다.

둘레가 약 1㎞인 파사성은 주변 지역에 험난한 산지가 없다. 따라서 파사산의 정상부에서는 양평과 여주 일대의 넓은 평야 지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남한강 하류나 상류 방향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파사성에서 북쪽으로 약 2㎞ 부근에는 현재 그 터만 전하는 이포梨浦나루가 있어 이 지역이 남한강의 수운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 강변의 육상교통로는 충주에서 시작해 여주-양평-서울로 이어지는 남한강을 따라 형성됐다. 이러한 육상과 하천교통로는 중부 내륙지역과 서울, 그리고 서해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인데, 파사성은 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정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곡나루축제가 열리는 여주
여주는 남한강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농산물이 잘 자라는 토양을 빚어냈다. 그래서인지 여주는 지역의 농특산물을 이용해 대표적인 축제인 여주쌀축제와 고구마축제를 통합해 여주쌀, 고구마, 땅콩 등 여주를 대표하는 농산물을 상징하는 ‘오곡’과 남한강의 나루터를 상징하는 ‘나루’를 합성한 ‘오곡나루’라 칭하는 축제를 매년 열고 있는데, 풍부한 볼거리와 먹거리 등이 마련된 대규모 축제이다. 행사의 내용 중 가마솥 여주 쌀밥 짓기, 여주 쌀 비빔밥, 색밥 짓기, 초대형 고구마 통으로 구워 먹기 등이 있는데 이 축제의 백미를 이루고 있다.
‘여주오곡나루축제’는 경기도와 문화관광체육부가 선정하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축제의 유망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풍성한 가을을 맞이해 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주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신륵사
여주는 맛있는 쌀이 생산되고, 광주 이천과 더불어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이다. 도시의 가운데를 남한강이 지나가고 서울과 가까워 인물이 많이 나거나 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여강 이씨, 여흥 민씨 등 대대로 세도가 가문이 있었고 명성황후 생가도 이곳에 있다. 여주에 오면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과 신륵사는 반드시 들리는 대표적인 곳이다.

그중에서 여강이 관통하고 있는 여주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신륵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사찰은 대부분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여주는 강가에 사찰이 위치하고 있어 매우 특이하다. 바로 그 강가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 신륵사이기 때문이다. 우선 창건과정에서부터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륵사 금당으로 가는 길에 구룡루라는 누각이 있다. 구룡루라는 이름은 절의 창건설화에서 기원했다. 확인된 기록은 없으나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자리라 일러주었고 원효는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신륵사였다고 한다. 연못을 메우기 전, 연못에서 9마리의 용이 승천했다고 하는 설화에 따라 누각 이름이 구룡루가 됐다고 한다.

한편 신륵사와 가까운 곳에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이 자리하며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이 됐다. 절을 아늑하게 감싼 뒷산은 봉황의 꼬리를 닮았다 해서 봉미산으로 불리는데 해발 156m의 야트막한 산이다. 예전에는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로 속리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신륵사가 사찰 그 이상의 영지靈地가 된 동기는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륵사라는 이름은 신령 신神에 굴레 륵勒자를 쓰는데 풀이하면 신비로운 굴레라는 뜻이다. 고려 우왕 때, 마을에 용의 머리와 말의 몸을 가진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줬는데 이때 나옹화상이 용마에게 신비한 굴레를 씌워 제압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추측건대 용마는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뜻할 것이다. 폭우 때마다 여강이 범람해 수해를 입으면,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처님에게 올리는 기도뿐이었을 것이다. 또한 나옹화상은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이름난 고승이었고 그런 미륵과 같은 존재를 사람들은 정신적 지주로 여겼을 것이다.

한편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했다고 해 절 이름을 신륵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했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해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뤄졌다.

이때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됐다.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됐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했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해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배불정책으로 신륵사는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했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돼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했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했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됐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여러 번에 걸쳐 중건과 중수가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해 조사당祖師堂·명부전冥府殿·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금당인 극락보전 정문에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자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한편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조사당은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돼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해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돼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다층전탑,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제존자석종,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제존자석종비,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대장각기비가 있다.

그리고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해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신륵사와 나옹화상 이야기
신륵사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품고 있는 설화와 보석이 무수한데 그중 단 한 가지의 키워드를 꼽자면 ‘나옹화상’이다. 인물 한 명으로 현재 신륵사에 남겨진 보물들, 숱한 옛이야기들이 다 설명될 수 있어서다.

나옹의 법명은 혜근(惠勤 : 慧勤), 처음 이름은 원혜元慧이며 법호를 나옹懶翁, 머무는 곳을 강월헌江月軒이라 불렀다. 성씨는 아牙씨로 경북 영덕군 영해寧海 사람이다. 아버지는 선관서령饍官署令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며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역사에 자취를 남겼던 많은 선현先賢이 그렇듯 나옹에게도 탄생과 관련된 신비스러운 꿈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루는 어머니의 꿈에 황금빛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머리를 쪼며 알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뒤로 태기胎氣가 있었다. 어머니 정씨는 그 뒤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1320) 1월 15일 나옹을 낳았다. 이 어린아이는 골격이 특이했고 자라남에 따라 머리가 남달리 뛰어나 장차 쇠퇴일로의 고려 말 불교를 빛내줄 거라 모두 믿고 있었다.

그의 나이 20에 이르러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의 문제는 내부에서 잠자던 나옹의 종교적 천재성天才性을 마침내 드러나게 하는 하나의 전기轉機가 된다. 이 무렵 나옹은 절친한 친구가 죽자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현실의 죽음을 남달리 심각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문제로 삼았던 나옹은 벗과의 사별死別의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으로 요연了然선사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이때 불문佛門에 귀의하는 한 젊은이와 노선사가 나눈 문답에서는 상식을 초월한 지혜로움이 번뜩인다. 요연 선사가 “그대는 왜 머리를 깎았는가”라고 묻자 “이 미혹의 세계[三界]에서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게 바른길을 제시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요연은 엉뚱한 질문으로 대신한다. “그대 지금 여기에 왔는데 그것(나옹을 지칭)은 무슨 물건인가”라고 묻자, “말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이 온 것입니다. 보려고 해도 실체를 볼 수가 없고 찾으려고 해도 어떤 물체인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닦아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나옹의 대답이 여기에 이르자 요연은 그의 공부가 성숙했음을 간파하고 그에게 더 훌륭한 스승을 찾도록 권유한다. 이렇듯 선승의 길을 걸었던 나옹화상은 스승인 요연 스님의 문하를 떠나 양주 회암사에 처소를 정해 밤이고 낮이고 일절 눕지 않은 체[長座]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나옹은 4년 동안 부지런히 정진하다가 더 높은 경지를 터득하기 위해 마침내 1347년(충목왕 3) 11월 중국을 향해 북쪽으로 구법求法의 장도長途에 올랐다. 이듬해 3월 13일 원元나라 서울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도착, 그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印度 스님 지공指空 화상을 찾아서 불도佛道를 묻고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 고려로 돌아와 양주 회암사를 중창하는 대불사를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이렇듯 선승으로서 이름을 날린 나옹화상과 관련해 신륵사에는 수많은 전설과 보물들이 깃들어 있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이다. 조사당에는 지공, 나옹, 무학 세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나옹의 스승이 지공, 나옹의 제자가 무학으로 이들은 고려시대 삼대 화상三大和尙으로 일컬어질 만큼 불가에 큰 영향을 끼친 스님들이다. 이중 나옹화상은 따로 소조상이 봉안돼 있다.

생불로 불렸던 나옹화상의 사리는 신륵사보제존자석종에 안치돼 있다. 석종 부도 오른편에는 보제존자석종비가, 앞쪽에는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서 있어 이 세 석조물이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세월의 이끼가 앉아 있는 석물들은 투박한 듯 보이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면 대단한 걸작품들이다. 석종부도의 승탑은 이름 그대로 종 모양의 몸돌을 금강계단처럼 네모난 받침돌이 지지하고 있다. 석종형 몸돌의 겉면은 아무 장식이 없지만 꼭대기에는 불꽃무늬를 새긴 4각의 보주가 장식돼 있다. 이는 통도사, 금산사 등의 승탑과 함께 조선시대 석종형 승탑의 선구적인 양식으로 평가된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단조로운 느낌의 승탑과 달리 섬세하고 화려한 용과 비천 조각이 돋보인다. 스님이 가시는 길, 불을 환히 밝힌다는 느낌이다. 승탑 옆 석종비에는 나옹화상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사당을 조성한 내력과 스님의 업적이 적혀있는데 이는 고려 말 명필로 통하는 문인 한수韓脩가 썼다.

여기서 남한강가에 있는 다층전탑이 보이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기단 위에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은 형태로 마치 서로 다른 탑 두 개가 합쳐진 듯하다. 이것이 바로 신륵사 다층전탑으로 국내에 몇 기 남지 않은 다층전탑이자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한 문화재다. 풍수적으로는 수해를 막는다는 의미의 비보탑裨補塔 역할을 한다. 벽돌을 자세히 보면 넝쿨 문양, 반원 문양 등이 새겨져 있으며 탑 안에는 나옹화상의 사리 중 5개를 봉안했다고 한다.

1726년, 탑이 무너져 복원 작업을 할 당시 ‘나옹탑’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높이는 약 9.4m로 강 위에서도 탑이 잘 보인다. 옛날에는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향하던 뱃사공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는 불자의 마음에 빛을 비추는 등대나 다름없다.

타고난 문장가이기도 했던 나옹화상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 중 <청산가>는 모두가 아는 유명한 글귀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신륵사 다층전탑 바로 아래에는 오랫동안 머물며 강을 바라보게 되는 정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당호이다. 그리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 있는 삼층석탑은 나옹화상을 다비(茶毘, 불교식 화장)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신륵사는 나옹화상이 유배 가는 도중 병세가 심해져 머물게 된 사찰이었다. 그는 결국 이곳에서 열반에 올랐는데 객客으로 든 절이었음에도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결국 여주 하면 신륵사, 신륵사 하면 나옹화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가을 나옹화상의 <청산가>를 읊조리며 남한강가에 위치한 신륵사를 돌아보면서 여주가 자랑하는 농특산물을 함께 맛보면 어떨까? 지난 여름 더위와 물난리로 고생한 심신을 위로하고, 코로나에 찌들었던 우리네 삶을 조금이나마 활기차게 되돌릴 수 있는 전환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이도남 건국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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