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커뮤니티 아트

편리함을 느끼게 하는 감각과 여기서 소외된 이들
지도는 일상생활에서 유익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와 용도를 갖는 지도를 우리는 계속 만들고 새로운 기능을 위해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고 지도 제작을 시도한다. 이런 거의 모든 지도는 좌표를 통해 위치 정보를 우선 고려하도록 고안됐다. 결국 길을 찾아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유용한 도구가 지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유용함에는 인간의 감각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인식이 담겨있다. 그것은 바로 보는 행위, 눈으로 본다는 그 감각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아니 전 지구적으로 지도라는 기능이 갖는 핵심 내용이다. 보는 것, 본다는 행위는 신뢰할만한 것이다.

길을 찾으려는 사람은 모두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이다. 목적지 없이 길을 찾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본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행위의 사이에는 아직 모르고 있는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는 전체 행위를 지도에 의존한다는 또 하나의 믿음이 간섭을 한다. 디지털 환경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 안에서 좀 더 편리한 생활을 하는 우리는, 지도 활용에서 더 실감할 수 있는 변화된 삶을 누리고 있다. 손가락으로 확대 축소할 수 있는 전방위적 지도 검색 행위를 통한 너무 편하고 너무 쉬운 이용 방식 때문에, 이제 지도의 유용함은 낯설지만 완전히 새로운 감각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지도는 보는 것에 대한 신뢰와 함께 촉각에 의해 편리함을 판단하는 새로운 감각에 대한 의존, 두감각의 총체적 행위의 결과와 연결돼 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감각에 의존하는 지도의 역할이기도 하다. 결국 이제 우리는 시각과 촉각에 따라 쾌와 불쾌를 판단하면서, 그 무한 신뢰 위에서 낯선 최종 목적지를 향해 겁 없이 길을 나선다.

한번 생각해 보자. 이 두 가지 감각의 조합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는 사람의 일상은 새로운 지도로부터 얼마나 깊은 소외감을 느끼게 될까? 시각 정보의 차단, 아니 그 정보로부터 배제된 사람의 감각은 이 단순한 지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고립돼 있는가? 그들의 촉각은 이 지도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의 촉각은 예민하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신뢰의 정도가 일반인의 촉각보다 더 정확하지만, 아예 감각의 발휘 기회가 지도-제작 방식으로부터 차단돼 있다.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든 과정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길 찾아 나서는 단순한 결심이 얼마나 힘든 하루하루를 만들고 있을까?

이윤 너머의 가치를 위한 듣는 지도
빠르게, 깊이 그리고 엄청난 너비로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는 새로운 삶의 행태로 변화하는 모습이 낯설다. 이 변화의 속도는 기술에 의존해 과학-기술에 예속된 생활 방식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닦달한다. 그런 닦달은 너무 쉽게 특별한 사람의 상태와 삶의 사태를 무시하거나 모르쇠로 대응한다. 아마도 그건 닦달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이윤의 너머에 특별한 감각이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진단과 분석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그리게 한다. 이제 우리는 특별한 인간의 특별한 감각을 두고, 지도같이 유용한 생활 도구의 쓰임새를 다시 생각해 봐야만 한다. 모든 인간의 감각은 모든 인간의 이성만큼 존중돼야 한다. 아니 감각은 이성이 할 수 없는 미지의 역할을 삶 안에서 굳건히 떠맡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더욱 신뢰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술적 사유가 요청되고, 공공예술의 실험이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사유의 틈을 계속 확장시킨다.

“귀로 듣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때 “귀로 듣는” 어떤 태도는 특별한 인간의 감각을 우선해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장애障礙를 가진 사람들의 ‘그 특별함’ 역시 “특별한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우선 이해돼야 한다. 보는 지도만큼이나 듣는 지도는 지도의 유용성이 인간의 특별한 감각에 대한 믿음에 연결돼 있기에, 결국 인간의 감각에 대한 존중의 방식으로 이 사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럼 듣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 행위가 보는 지도만큼 매진邁進해 왔는지 지금 살펴야 한다. 이미 “워킹 내비게이션”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다. 마치 이미 거의 모든 편이성을 위한 지도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그런데 보는 지도는 늘 새로운 형식과 좀 더 편리한 이용 방식을 향해 애쓰며 나간다. 듣는 지도는 “그래, 그런 것도 이미 우리에게 있어”라고만 말하는 지점에서 멈춰 있다.

듣는 지도는 말하는 일을 통해 길을 찾고, 목적지에 이르도록 해야 하기에 말하는 방식을 다듬고 세세한 현장에서 말하기를 통해 길을 말로 그려낼 수 있도록 애쓰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그래서 듣는 지도는 말하는 지도이고, 말하기는 듣기에 앞서 우리가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운 과제다. 이 과제는 이윤의 경계를 따지고 드는 세태와 달리 무진하게 애를 써야 도달할 수 있는 우리-공동의 이윤의 밖 세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갖는다.

새로운 융합을 향한 예술적 사고
듣는 지도는 말하는 지도이기에 청각에 덧붙여진 감성적, 이성적 언어를 통해 세상이 만들어지는 언어화 과정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시각 디자인이 정보 디자인 영역을 만나는 단순한 결합 형식을 넘어서는 복잡한 디자인 영역의 융합 과제를 떠안고 있는, 실로 새로운 영역의 예술적 사고를 요청한다.

당연히 이런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참여해야 하는 예술적 사고의 소유자들은, 이들을 우리는 앞으로 예술가로 부르자. 각자가 연무했던 저 먼 옛날의 예술-기술이 얼마나 하찮은 역할을 떠안고 있었는지 실감할 것이다. 그 반성 위에서 예술적 사유는 ‘서로-소통’하고 ‘상호-의존’하는 집단 기술의 유익함을 발견할 것이다. 서로-소통하는 것은 듣는 지도와 말하기가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융합방식으로 변종 세계를 떠안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첫걸음이다. 낯선 길을 가는 사람들은 낯선 것들에 호의를 갖고 의존해야 한다.

예술적 상상력, 즉 예술적 사고란 아직 명확하게 규정적 의미를 갖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제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의미론적 접근을 통해 우리는 이 개념을 생활 감각에 연계해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예술적 사고는 늘 사회 규범적 한계와 윤리적 사유의 미답未踏에 대한 경계를 끊임없이 간섭하고 습격하는 가능성에 착종하는 구체적 실행의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듣는 지도와 말하기의 실험이 융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신뢰에 대한 도전 역시 예술적 사고를 강력히 요청한다.

서구 근대가 비록 인간의 자유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계승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업적을 이해한다고 해도, 관계 안에서 자유와 윤리성을 떼어 생각할 수 없기에, 공동체적 사유의 위험한 한계를 다시 떠안아야 하는 사고유형의 변용으로 예술적 사고는 구체성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예술적 사고는 실로 다양한 변수와 실행 단계의 다양한 좌절 가능성 안으로 던져지는 놀라운 도전을 끌어안는다. 더구나 예술적 사고는 여럿의 모임을 통해 실행되는 실존적 이해 방식에서 작동되기에 더더욱 갈등의 해결이라는 이중의 현실적 과제를 통해서만 사유할 수밖에 없다.

듣는 지도는 예술적 사고를 통해 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이를 과제로 여기는 일단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갖는 무리를 형성하고 참여해야 한다. 자본주의 틀을 맹신하는 사회에서 이런 기본적 작동 방식과 일하는 형태로 만든 듣는 지도는 기업활동의 외부, 즉 기업의 사회봉사 차원의 활동과 연계되거나, 대학에서 일종의 커리큘럼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아니라면, 시민사회의 결기에 따른 시민행동이 정부를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의 권리에 대해 무지한 우리 사회의 정부 행태와 그에 대한 정치인들의 무식無識을 볼 때, 또 한국 사회에서 공公을 관官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사유의 빈곤함으로 인해, 듣는 지도는 다중의 선의善意에 기대하는 처량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비해 조금, 아주 조금 앞서가는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이 듣는 지도의 실현가능성을 정보획득 차원에서 살펴볼 이유가 충분하다.

완벽을 향한 여러 시도 중 하나일 뿐
NPO법인 ‘말의 길 안내’가 약 20년 동안 3천 군데 넘는 길 안내를 작성해 왔다. 길 안내는 음성으로 안전한 이동을 지원하는 “지도”이다. 그들의 작업 중 나카메구로역[中目黒区駅]에서 메구로[目黒区] 구청으로 향하는 루트 만들기를 사례로 보자.

우선 말로 사람을 유도하는 방법에 대해 자체 교육을 하면서 관련 기초지식을 배운 사람만이 듣는 지도 제작 현장, 즉 A부터 B까지 답사에 참여할 수 있다. 듣는 지도를 위해 가능한 짧은 거리를 우선 말로 길 안내하고 이를 차곡차곡 쌓아 지도를 점점 크게 만들어 간다. 때문에 사물을 보고, 말로 옮겨 설명하는 방법과 걷는 속도를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할지 역시 교육을 통해 서로-소통하면서 확정해야 한다. 그리고 정보를 입력할 수 있는 대상지를 몇번의 시행착오를 각오하면서 반복적으로 답사한다. 현장에서는 당연히 거리 측정을 하고 이를 정확하게 기입하면서 측정 표지를 언어화할 수 있는 상황을 정리한다.

또 하나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일은 시각-정보의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갖는 도보 통행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반드시 이 답사에 동행해야만 한다. 이로써 특별한 도보 이동의 방식에 맞춘 말-안내 길 찾기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까지가 현장조사 단계다. 이 조사를 통해 얻은 정보를 가지고 전용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협의해야 한다. 단어와 정형문 그리고 말하기 방식을 정리하고, 제공하는 숫자의 정확성을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보다 복잡하고 많은 양의 말하기 정보가 조합된다.

사람들은 쉽게 보도블록 중 점자블록이 있는데 왜 이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편리함의 ‘모듬’도 아니고 나의 편리가 타자의 편리일 수 없다는 더 이상 언급이 필요없는 존중의 관계, 차이의 인정, 다름에 대한 이해 방식의 삶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점자블록은 부족함을 이겨내는 한 가지 기능에 충실하지만 편리하고 안전한 모든 상태를 절대로 보장하지 않는다. 듣는 지도 역시 부족함을 극복하는 여러 시도 중 하나일 뿐 완벽한 지도가 아니다. 마치 보는 지도가 늘 한계를 갖듯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지도 제작은 실생활에서 쓰임을 받기 위해 늘 감각에 대한 신뢰란 관련된 일로부터 매진해야만 하는 쉼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는 일과 닮았다. 듣는 지도를 만들자는 제안이 단순히 장애인을 위한 선행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수해를 입어 남은 것 하나 없는 가게를 정리하는 누군가의 삶은 사는 일이기에 또 그것을 정리하고 다시-시작하는 일로부터 정당한 것과 닮은 것이다. 듣는 지도는 고된 삶의 거친 노동과 같다.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겨우 지도상의 짧은 길 하나를 지도화할 수 있다. 어렵게 만든 듣는 지도는 늘변화하는 ‘그곳’의 상태로 인해 또 같은 노동의 강도를 요구할 수 있다. 엎어진 가게를 정리하듯 또 당연히 ‘그곳’을 답사하고 정보를 모아 새로운 말 하기를 덮어씌우는 일은 듣는 지도가 단순히 이벤트가 아님을 알려준다.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듣는 지도 만드는 일에 기꺼이 뛰어들까?

이섭 아트컨설턴트
이섭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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