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평 교수의 자치이야기

한국주민자치학회/중앙회가 개최하는 세미나에서 자주 듣는 질문은 ‘주민자치 왜 해야 하나요?’이다. 십 수 년 간 수백 번이나 세미나가 열리고, 주민자치 전문잡지와 유튜브로 중계되었음에도 참가자들은 ‘주민자치를 해야 하는 논거’를 확실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오랜 기간 주민자치위원회 활동해 온 주민자치위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때는 의아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는 주민자치 전문가나 운동가들에게도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내왔던 일을 새삼 되돌아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은 왜 살아야 하나?’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갑자기 받는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 나름대로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서 ‘주민자치를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거’를 정리해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주민자치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논거는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긍정적, 적극적 차원에서의 주민자치 순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제도 및 관행 실패를 보완하는 소극적, 방어적 차원의 순기능으로 나눌 수 있다.


긍정 및 적극적 차원에서의 순기능

먼저 적극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주민자치를 하면 무엇이 좋아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해 볼 수 있다. 첫째 주민자치는 주민의 자발, 자주, 자율, 협동 정신을 함양하고 주민 중심으로 지역(마을)사회 문제 인식, 해결방안 모색, 주민의 요구 전달과 반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토대(풀뿌리 민주주의)를 구축할 수 있다. 둘째 주민자치는 주민 의식의 각성과 실천 행동을 통해 동네 사회자본(질서, 신뢰, 규범, 참여, 협동) 축적과 삶의 질(안전, 환경, 청결, 주민 보호, 복지, 소득, 교육 등) 확보에 이바지할 수 있다. 셋째 주민자치는 이익공유와 가치공유를 매개로 할 경우, 동네의 경제적 연대와 문화적 전승을 통해 동네의 윤택함과 문화적 자부심을 고양하여 주민 연대성 및 동네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방어적 차원의 순기능

다른 한편으로 주민자치는 다음과 같은 방어적 차원의 순기능을 한다. 첫째 주민자치는 정치 실패와 행정 실패를 보완하는 작용을 한다. 주민자치는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는 방식인 대의민주 정치(간접민주정치) 실패를 보완할 수 있는 풀뿌리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국민이 선출하는 정치인(대통령, 국회의원, 단체장, 시군구 의원들)들은 선거 이후에는 자신의 재당선, 소속 정당의 지시와 이익, 정치적 핵심 고객에 대한 봉사를 위한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일반 시민/주민의 보편적 권익을 대표하지 못하거나 주민의 기대를 배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민자치(회)는 주민이 중심이 되어 조직을 결성하여 마을의 중요 사안을 민주적으로 심의 검토 제안하고 실행함으로써 참다운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민자치 관행이 잘 정착된 선진국 사회와 그렇지 못한 후진국 사회의 사례를 비교해보면, 주민자치가 얼마나 대의 민주 정치의 실패를 잘 보완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민자치는 행정의 독단과 편의주의로 인한 정책 실패, 정부 실패를 견제하고 보편적 주민권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행정은 규범적으로는 정치적 중립, 효율성, 민주성, 반응성, 책임성을 확보하게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행정은 정권의 압박, 국회와 정당의 압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관료주의, 형식주의, 기회주의, 보신주의, 무사안일주의, 편의주의, 권위주의, 폐쇄주의, 각종 부정부패 부조리와 관련된 경우가 빈번하다. 정책과 행정은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흔들리게 되고, 공무원은 각자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런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비제도적 장치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잘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확실한 견제 장치는 튼실한 주민자치조직의 존재이다. 정치와 행정이 그들만의 이득을 추종할 때 이들의 무소불위식 기회주의적 행동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각성된 의식으로 무장된 주민조직의 연대와 행동이다. 주민이 강하면 행정은 주민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주민은 행정에 끌려가게 되어있다.

둘째 주민자치는 시장경제와 정부 제정이 할 수 없는 영역(시장실패 영역)에서 이익공유를 통해 동네 경제를 살리고 주민복지를 구현할 수 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을 중심을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공급자와 수요자,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에만 집중하는 관계로 인하여 동네나 마을의 열악한 경제복지 상황에 대해 배려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을/동네의 유무형의 재산이 존재할 때 주민자치는 이를 매개로 하여 동네 경제를 살리고 주민의 소득과 복지를 획기적으로 고양 시킬 수 있다. 예컨대, 마을 목장, 어장, 산림자원, 문화재 자원을 주민들이 공유 재산화 하여 공동관리와 공동 분배를 시행하는 곳이 있는 바 이는 시장실패 영역에 있어서 주민자치의 경제복지 보완적 순기능을 시사한다.

셋째 주민자치는 시민사회조직, NGO, NPO의 한계-즉 시민사회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다. 시민단체로 구성되는 시민사회는 산업화 과정에서의 부조리(정경유착, 독과점, 경제부 조리, 공해와 자연파와)를 폭로 감시 통제하며, 군사독재 저항, 민주적 제도 및 정책 수립, 차별타파, 인권 고양, 노동문제 등 전 사회적인 분야에 걸친 사안에 대해 시민을 대신한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해왔다. 이 과정에서 정치 민주화, 경제정의, 환경 보전 및 공해추방, 소수자 인권, 고용, 안전, 교육, 복지 정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 괄목할 만한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민단체 간부들의 정치 편향적 활동, 비리 연루, 단체운영의 부실 등으로 인하여, ‘시민 없는 시민단체’, 소수 전문가/ 활동가의 독무대가 되면서, 시민사회(시민단체) 실패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지방자치 주민자치의 분야에서도 시민단체는 지방분권 이슈에 주로 천착하면서 주민자치 분야에 대해서는 등한시한 것이 사실이었다. 낙천 낙선운동을 주도하면서 정치불참여 선언을 한 참여연대 박원순은 서울시장 출마와 당선으로 그 약속을 어겼을 뿐 아니라 참여연대를 후견 조직으로 하여 서울시 주민자치를 정치적 친위 시민단체에게 용역을 주는 식으로 주민자치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는 시민단체의 위선과 허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일 뿐 아니라 시민단체 진출을 정치도약의 디딤판으로 사용하며 노골적으로 시민단체의 정치적 편향을 유도하고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권력 지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치열한 의지가 시민운동가에게서도 여실히 나타나는 것은 이제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결국 시민단체가 지켜주어야 할 덕목인 중립성, 진정성, 공익성은 변질 상실되어 가히 ‘시민사회 실패’라는 표현을 하게 되었다. 주민자치는 동네 주민 스스로가 마을의 욕구와 문제를 인지하는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숙의하고 협동하여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조직인 시민단체에게 동네 자치를 위임하고 그들이 정해준 사업을 하는 것은 기존의 관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편파적이고 이익 중심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시민단체의 자치 개입을 체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각성된 주민이 주민회를 결성하여 잘하든 못하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문제발견, 의사결정, 집행, 회계 관리 등 해 나가는 과정을 일상화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자생적이고 성공적인 주민자치 마을을 찾아내고 그들의 성공과정을 벤치마킹하여 지원하는 일을 한국주민자치중앙회가 선도해 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주민 실패를 보완하는 기제로서 주민자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주민자치위원회, 주민자치회, 주민자치 강화라는 제도와 구호를 남발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민 없는 주민자치’가 되고 말았다. 이는 주민자치를 하던 안 하든 주민에게는 그다지 큰 이득이나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 하는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재난이나 혐오시설 같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주민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엔간한 이득이 발생하지 않는 한 함께 모여 행동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주민자치에 대한 주민참여가 일어나지 않는 ‘주민 실패’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주민 실패를 교정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민자치 성공사례를 찾아내어 그 성공 요인과 장애물 극복을 자세히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부터는 한국주민자치중앙회와 한국주민자치학회가 중심이 되어 사례조사, 답사, 세미나 등을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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