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핵전쟁이 지구를 초토화시킨 근미래. 인류를 정복한 기계들은 인간을 말살시키려 끈질긴 소탕작전을 펼친다. 그들의 수장인 스카이넷은 인류저항군의 리더를 없애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아예 그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과거로 전사를 보내는 것이다. 곧 이 계획을 수행할 T-8001984년의 로스앤젤레스에 떨어진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그러자 인류저항군 또한 T-800에 맞설 사람을 파견한다. 그들은 인류의 운명이 걸린 싸움을 시작한다.

 

터미네이터 T-800, 2029년의 A.I

눈치 챘겠지만 저 유명한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 제임스 카메론, 1984) 1편의 설정이다. 인류저항군으로 성장할 존 코너의 출산을 막으려는 T-800과 대결을 벌이는 카일 리스는 사실 존 코너의 아버지였다. 카일은 사라 코너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으나 터미네이터는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운 데다 놀라운 시각효과와 스릴러적 재미까지 갖춘 수작으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으며 SF 영화의 고전으로 지금까지도 인접 장르 영화들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터미네이터개봉 당시가 1984년이니 T-800현재에 떨어진 미래의 기계였다. 그렇다면 A.I가 인류를 지배하게 된 미래는 언제였을까? 지금부터 6년 후, 2029년이다. ‘미래소년 코난2008년 배경이었고 블레이드 러너2019년을 배경으로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만큼 20세기 후반에는 21세기가 대단히 먼 미래로 느껴졌고 그 쯤 되면 모든 것이 바뀌어 있으리라 상상했던 것 같다. 기술문명의 발전이 영화보다는 느리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외계인의 출현 말고는 이제 정말 영화가 미리 보여줬던 일들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GPT와 같은 A.I 기반의 프로그램이 대중들에게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A.I가 얼마나 빨리 발전할지, 인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알 수 없는 시점에서 터미네이터의 상상력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A.I, 인간적인가 인간의 적인가

마침, ‘크리에이터’(The Creator. 가렛 에드워즈, 2023)라는 영화가 개봉중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하지는 않지만 고질라’(2014),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6)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가렛 에드워즈가 연출한 블록버스터로 디즈니의 야심이 담긴 작품이다.

터미네이터의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동시대적 고민을 담아내면서 전혀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인간적인가 인간의 적인가라는 포스터 카피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A.I가 인간과 다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 근미래,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A.I들은 인간들이 일자리를 뺏는 것이 두려워 오히려 핵폭탄을 터뜨린다. 그 때부터 인류는 A.I를 말살해도 된다는 명분을 갖게 되고 서구인들은 여전히 A.I와 인간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뉴아시아지역을 공격한다. ‘노마드로 불리는 거대한 하늘의 병기는 로봇과 뉴아시아 거주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모든 A.I의 창조자인 니르마타를 색출하기 위해 미 정부로부터 파견된 언더커버 요원이다. 그는 니르마타와 가까운 관계인 마야’(젬마 찬)에게 접근해 결혼하는데 성공하고 마야는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 영화 초반부 조슈아와 마야가 침대에서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신은 그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조슈아에게 딜레마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노마드가 이들의 거주지를 공격해 오고 이 사건으로 마야를 잃은 조슈아는 쓰레기 폐기장에서 일하게 된다. 5년 후 하웰 대령’(엘리슨 제니)은 조슈아에게 마야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며 노마드를 없앨 새로운 로봇, ‘알파-’(알피)를 찾으라고 명령한다. 조슈아는 마야를 만나기 위해 위험한 임무에 앞장선다. 오직 아내와 재회하고 싶다는 열망만이 조슈아의 동력이라는 점은 온전히 영화에 감정을 이입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부분에만 함몰되어 있기에는 할 얘기가 많은 영화다.

 

‘A.I의 전원을 끄는 것의 의미

가렛 에드워즈 감독은 ‘A.I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A.I의 전원을 끄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 만약 그 A.I가 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질문을 각본에 녹였다고 밝힌 바 있다. 명령을 거역하고 목숨을 걸어가면서도 조슈아가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가진 알피를 없애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대답일 것이다.

여기에는 A.I가 인간과 유사한 존재가 된다면 그들의 전원을 끄는’(off) 것은 A.I 입장에서 죽이는것과 다름없는 행위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주체를 일방적으로 꺼버리는 것은 폭력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에이터는 조슈아와 알피의 교감, 관계 변화를 통해 뉴아시아인들의 편에 선다.

물론, 알피는 우리 사회의 모든 소수자들로 대체될 수 있고 그것이 당장은 더 공감 가능한 문제의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A.I는 계속 인간을 모델로 전방위적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알피를 A.I 로봇 자체로만 보아도 무관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녀’(스파이크 존스, 2014)에서처럼 가까운 지인이 물리적 실체도 없는 A.I 프로그램과 연애를 하거나 버즈 라이트이어’(앤거스 맥클레인, 2022)에서처럼 A.I 반려묘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라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슬슬 해야만 한다.

크리에이터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대다수의 영화들과 달리 현재 지구의 자연 환경과 유사한 공간들을 많이 보여준다. 뉴아시아의 풍광은 실제로 태국, 베트남, 네팔, 인도네시아 등 80곳이 넘는 장소에서 1600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하며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 먼저 프로덕션 디자인을 한 후 크로마키에서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 SF영화의 제작방식이지만 크리에이터는 로케이션 이후 세트를 디자인하고 편집 단계에서 디자이너들과 함께 CG를 덧입히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보다 사실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영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기계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듯 친환경적인 뉴아시아의 풍경은 이 영화에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이만큼 눈의 피로도가 덜한 SF영화도 드물 것이다. 이러한 공간 묘사는 A.I와도 평화롭게 공존하기 원하는 뉴아시아인들의 삶의 태도와 잘 매치된다.

 

여전히 피해가기 어려운 오리엔탈리즘적 시선 그러나

이상적인 공간으로 설정된 지역이 뉴아시아라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동양을 미개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순수한 이상향으로 상정하는 시각은 공히 동양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의 경우, ‘조슈아라는 이름이 여호수아의 영어 이름이고 여호수아는 곧 예수의 본명인 예수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서양이 동양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 인식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아바타’(제임스 카메론, 2009)의 서사가 가진 맹점 그대로다.

그러나 지나치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뉴아시아 자체가 말 그대로 현실의 동양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새로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니르마타는 서양 종교에서의 창조주 개념과 가깝다. 이분법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크리에이터의 배경은 언제일까? 50년 후다. ‘터미네이터의 예측이 조금 빨랐던 것처럼 2083년도에 인간과 A.I가 정말 전쟁을 벌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이 영화의 고민은 훨씬 구체적이고 진지해져 있을 것이다. 미래학자이자 공학자인 소니아 에리슨은 2050년에 인간 수명이 150살까지 연장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니 2083년까지 살 확률이 높은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A.I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보는 게 어떨까.

 

사진=태흥영화사/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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