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첫 마음

- 정채봉(1946-2001)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정채봉 시인의 시 「첫 마음」이 갑진년 새해 아침을 밝힌다.(『내 가슴 속 램프』 샘터사 2000).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성인 동화’란 새로운 문학용어를 만들어 낸 시인은 정채봉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늘 평범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으며 맑고 따뜻한 시선을 선사해준다.

시인은 동화처럼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새해 벽두에 그리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올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새해 해돋이를 보러 산으로 바다로 추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방송으로 보면서 시인의 ‘첫 마음’을 읊조리게 된다.

시인은 새해를 맞는 사람들에게 각자만이 갖고 있는 ‘첫 마음’을 돌아보지 않겠느냐고 잔잔한 어조로 제안한다. 지키지도 못할 새해 계획이라고 지레 포기하려는 사람에게는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다시금 새해를 디자인 해 보라고 한다. 어린 시절 한 살 더 먹는다는 뿌듯함에 설레던 그 ‘첫 마음’이야 세월과 함께 심드렁해졌다 해도,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을 되살려보는 새해를 제안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만이 ‘시간적(zeitlich)’ 존재자라고 말했다. 그러니 올 새해, 삶의 처음이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한 해의 시간을, 시인의 말대로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아껴 보듬으며 보내는 것만이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첫 마음’

새해 ‘첫 마음’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다. 인간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는’ 시간적 존재자다.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우리 모두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에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실존가능의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나아가 도대체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접하고 있는 사람들의 바램, 욕구 혹은 욕망과 맥을 같이한다. 그 대답은 바로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자기계발서나 강의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넘쳐나고 있다. 그에 따른 수많은 댓글들이 줄을 잇는다. “나도 주인으로 살고 싶다. 당당히”, “내 삶의 선택권을 내가 쥐고 싶다”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라도 주인으로 살고 싶다” “두려움과 공허함, 결핍,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해방되는 것이 주인의 삶이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혹은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문제는, 평소에는 잊고 사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정면으로 맞설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이다.

굳이 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동물이지만 이성을 지닌 인격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칸트 역시 동물성(animalitas)과 이성성(rationalitas)을 지닌 이중성격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찾고, 나아가 인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중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동물성‘과 ’이성성‘ 모두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와 같은 외적인 물리적 조건에서만 주인이 된다고 주인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내적인 요인이 충족되어야 한다. 동물성은 물질적이며 가시적이지만 이성성은 정신적이며 비가시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자신의 내부[이성성]로 들어와야 한다. 주인의 반대는 노예다. 물론 사회 계급적 의미의 주인과 노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학벌, 직업, 직위, 돈 등에서 소외된 사람도 인간의 존엄성을 갖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반면에 정치사회 경제적인 권력자도 동물성만 충족시키는 삶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의 인과성(因果性), 즉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물리적 존재자지만, 그 외부적인 자연의 인과성에만 지배받을 경우 정신적 노예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회경제적 지위나 계급에 종속되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가능성이자 특권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자연의 인과성에만 지배받지 않는 존엄성을 누리면서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인가?

 

‘자기입법’의 삶, 자기입법의 경영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새로운 생각[마음], 즉 시인의 ‘첫 마음’을 다잡거나 새롭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인지를 인류 역사상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철학자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인 칸트다.

칸트는 인간 각자가 스스로의 동물성을 통제하는 주인이 되면서 아울러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오로지 ‘이성성’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칸트의 철학적 개념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일상의 말과 생각,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저런 행동은 인간이 아니지’ ‘인간으로서 그럴 순 없지’ ‘사람이 되어야지’ 등의 말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들은 인간이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어떤 행동의 규칙이나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그 행동 규칙을 스스로 만들고 그에 자발적으로 따르는[복종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른바 ‘자기입법(self-legislation)’ 능력이다.

자기입법이란 말은 얼핏 들으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저 ‘좋은 말’로서 혹은 현학적이며 추상적 개념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입법은 250년 전 독일이란 나라의 칸트의 철학 혹은 ‘첫 마음’만이 아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삶의 주인으로 사는 비결’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 1] 「어른 김장하」 MBC 경남 다큐멘터리(감독 김현지, 2023)

어른 김장하. 윤성은 영화평론가가 ‘닮고 싶은 어른’으로 소개한 인물이다(주민자치 2023년 12월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한약방에 취직해 주경야독하며 한약업사 자격을 얻었다. 그렇게 60년간 한약방을 하며 번 돈을 모두 지역사회를 위해 헌납했으며 본인은 늘 검소하게 생활했다. 20대부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는데 수혜자가 무려 1000명이 넘는다.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세운 명신고등학교를 선뜻 국가에 헌납했으며 호주제 폐지 등 약자를 위한 인권운동과 각종 문화예술단체 등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보수색 짙은 고장에서 주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지 않고 정의란 무엇인지 늘 고민하며 실행하려 애썼다.

 
[사례 2] 매일유업의 손해 보는 사업

신생아 5만 명 중 1명꼴로 태어나는 선천성 대사이상 아기들. 아미노산 분해 효소가 부족해 모유는 물론 고기나 생선, 쌀밥에 포함된 단백질조차 못 먹는다. 잘못되면 뇌세포 손상으로 죽을 때까지 지적장애가 되거나 심하면 생명을 잃게 된다. 유일한 생명줄은 아미노산을 제거한 의료용 특수 분유다. 허나 특수 분유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수만 캔씩 생산하는 조제분유 공장라인을 일시에 멈추고 모든 생산설비를 해체한 후 하루 종일 정밀 세척을 해야 한다. 게다가 세척 과정마다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수익을 고려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허나 국내에서 딱 12명 만 먹는 MF 분유 등의 생산을 위해 대형공장을 기꺼이 멈추는 기업이 있다. 매일유업이다. 이렇게 손해 보는 사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용이 얼마가 들던 특수 분유 사업은 멈추지 말라”는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율적이며 보편적인 자기입법

사례 1과 2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기입법이다. 자기 스스로 삶의 방식이나 경영의 법칙, 행동의 준거를 만들고 지키는 자기입법의 삶, 경영이다. 남이야 뭐라 하든, 또는 자기 고장의 ‘주류 이데올로기에도 편승’하지 않고, 무엇이 정의로운 일인지를 이성적으로 스스로 고민해 결정한다. 이익은커녕 손실이 발생하지만 옳은 일이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 특수 분유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자기입법의 삶이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지면상 두 가지 사례만 들었지만 우리 주변에는 자기입법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이나 기업들이 적지 않다. ‘나 하나 친환경 세제를 쓴다고 자연환경이 달라지지 않겠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친환경 세제를 쓴다’는 개인들도 적지 않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김장하’를 닮고 싶은 어른으로 소개하며 ‘진정한’ 어른이라고 평가했다. 김장하가 ‘진정한’ 어른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칸트의 말로 표현하면, 그가 자기입법자이기 때문이다. 매일유업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5년 연속 1위를 한 이유도 바로 자기입법의 경영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닮고 싶은 어른, 존경받는 기업의 사례를 보면, 칸트가 강조하는 자기입법의 조건이 크게 두 가지란 점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자율적 자유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정초』와 『실천이성비판』에서 스스로 수립한 도덕법칙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자유, 즉 자율로서의 자유 개념을 제시하였다. 앞의 사례에서 보듯 자기입법자로서의 개인이나 기업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율적 자유를 행사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순수한 이성에 근거를 둔 욕구[의지]에 충실해 스스로 행위의 기준을 만들고[자율적], 남이야 뭐라 하든 내 의지대로[자유] 행동하는 것이다. 단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법칙과는 다른, 자기 내면[이성]으로부터 유래하는 법칙을 자율적으로 수립하고 이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율적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보편성이다. 사례를 든 김장하의 삶, 매일유업의 경영은 모두에게 공감을 넘어 감동을 준다. 보편적이라는 의미다. 자신의 행동 규칙을 생산·창조[입법자]한다고 해서 사회가 정한 행동의 기준을 모두 무시하거나 혹은 그 기준을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따라 자의적으로 생산, 주조(鑄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자율성에 입각해 설정한 기준은 보편성, 즉 인간 이성이 명령하는 법칙 혹은 우리 내면의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지시하는 보편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보편성은 외부가 아닌 나의 내면의 이성이 명령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입법은 각자의 자발적 행동을 바탕으로 하지만 각자의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가치 있음’으로 여겨지는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규범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새해, 주민자치로 내 삶의 주인으로

주민자치의 핵심은 자기입법이다. 실질적인 주민자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주민들의 보이지 않는 핵심자질은 자기입법의 역량이다. 읍면동, 통리라는 지역공동체는 필수적으로 규칙이 필요하며 그 규칙을 외부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들이 집단적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만들고 따르는 자기입법의 능력과 태도가 주민자치의 핵심인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요구되는 것은, 칸트가 말한 대로 이성을 가진 모든 주민은 자기입법의 능력을 유전적으로 구비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모든 주민이 자신의 순수이성에서 나오는 욕구능력을 행사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개인의 이해관계나 정념적인 경향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은 집단적 차원의 자기입법 능력에 의해 얼마든지 조정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주민자치의 ‘힘’이다.

칸트가 외치는 자기입법이란 언어가 혹시라도 생경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내 안의 유전적인 자기입법의 능력과 불꽃, 열망(pathos)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파토스가 잠들어 있다면 그것은 나의 탓만이 아니다. 주민자치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자기입법의 파토스에 대한 ‘무지’, 그 결과 실질적인 주민자치를 통해 주민들이 자기입법의 파토스를 불사를 경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자기입법 능력이 실질적 주민자치를 만들지만, 실질적 주민자치가 주민들의 자기입법 능력을 가져온다. 그리고 자기입법 능력의 확인은 다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자기효능감, 내면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새해에는 ‘진정한’ 내 삶의 주인이 되고픈 열정을 주민자치를 통해 불살라 보자. 칸트는 말한다. “강한 의지를 가져라” 그리고 “용기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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